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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등감과 냉소로 빚어진 사회
    2021. 12. 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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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항상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대학원 시절을 함께 보낸 동기들 중에도 당연히 그런 친구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 친구는 늘 활동적이고, 활발하고, 무엇이든 적극적인 매력적인 친구였다. 게다가 수석 입학으로 매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졸업까지 현금으로 지급되는 혜택도 받고 있었으니, 물리학과의 인싸 중의 인싸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구설수에 늘 오르고 내린 것은 바로 이 수석 입학자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 아닌 특혜 때문이었다. 이곳은 연구중심 대학으로 석차에 상관없이 학생이기만 하면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보조, 연구 지원금 심지어 식비 보조금까지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입학시에 주어진 이 혜택 하나가 우리와 그 사이를 감정에서 부터 조금씩 갈라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렇게 왜곡되고 곡해되어 갔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결과가 나올때 마다 우리는 그의 점수와 등수를 신경써서 보기 시작했고, 연구는 얼마나 잘 하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학기중 성적도 변변치 않으면서도 수석이라는 타이틀과 경제적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입에 오르내리며 뒷담화를 까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그가 독립유공자의 증손자로 입학시 가산점을 부여받아 수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자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등에 대한 대우에는 모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차석 입학자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장면 둘.

     

    연구소에서 여러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면 문득 드는 생각들 그리고 장면들이 있다. 

     

    분명 나보다 영어도 못하고 연구 성과도 변변치 않은거 같은데, 좋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앉아 있는 연구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든다. 학위도 없는데 정출연에 정규직 연구원으로 일 하고 있는 연구자를 보면 또 괜한 억울힘이 치밀어 오른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명문대 정교수 트랙으로 올라 20대에 교수가 된 연구자를 연구소나 학회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열패감과 열등감에 휩싸인다. 분명 눈에 띄는 대단한 성과도 보이지 않는데, 여성 할당제를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얻은 연구자를 보면 말하지 못할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 속에서 메아리 친다. 인터넷에서 논문을 찾아 읽다가 학부 졸업 논문 같이 보이는 논문이 사실은 박사 학위 논문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내 인생의 선택과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욕구를 쓸어 내리게 된다. 연구실에서 연구는 하지 않고 주식 시황을 들여다보고 주식 이야기만 하며, 보고서에 넣을 그럴듯한 그림만 그려서 구색만 맞추려는 정규직 연구원들을 보면 분노와 동시에 부러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장면 셋.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거의 모든 버스가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라디오를 켜고 지나가고 있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저녁 방송 뉴스였고, 표창장이 어쩌고 라면, 라면 라면, 라면 이야기가 들러나오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다 똑같은 놈들이다’ 라거나 ‘입바른 말만 하는 위선자’ 라거나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따스했던 봄날엔, 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 된다는 소식에 취준생들의 불만이 아우성 쳤다. ‘시험도 안보고 정규직이 되는 것은 불공정하다’라며 공정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느 외로웠던 봄날엔, 수많은 꽃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자리에 꽃 자국은 남아있지 않았다. 우연히 들은 어느 라디오 시사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는 보험금이었다. 유가족이 보험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고, 보상 범위는 얼마나 될 것인지를 방송에서 논쟁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러 밥을 먹을 때면, 옆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저거 다 보험금 받으려고 그러는거다’, ‘좋겠네 부자되서’, ‘다 노조라더라 다 빨갱이들이야’.

     

    열등감과 냉소로 빚어진 사회

     

    수석 입학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혜택이, 한 사람과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 지었다. 누군가는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할 것이고, 그 노력의 결과로 성취된 보상은 인정되고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그 트로피가 ‘공정’한 절차에 의해 수여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한 타고난 조건에 의한 것일 때, 우리는 모종의 열등감과 분노, 혐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성향이 있기에, 항상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교우의를 점하려 애쓴다. 그러다 자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비춰지는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성이 자신의 그것보다 낫다고 판단되면, 이 지점에서 다시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자기과시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SNS는 이러한 감정을 보다 강화시키는 기재로 작동한다. 때문에 우리는 생활 속에서 조금씩 타인이 비해 부족한 나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고, 타인보다 더 우월한 듯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은 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누적된 이러한 경험은 우리를 조금씩 냉소와 불신의 구렁으로 밀어 넣는다. ‘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는 왜 안될까, 난 글러 먹었나 봐', ‘내가 이렇게 노력해도 안되는걸 저 사람이 쉽게 했으니 분명 무슨 뒷배가 있을 것이 틀림없어’ 처럼, 우리 자신을 멸시하고 혐오 하면서 동시에 타인을 의심하고 냉소하고 만다.

     

    지나간 계절들 속에서 들었던 모든 말 속엔 그들의 삶 속에서 겪은 경험과, 애환, 분노, 성찰이 담겨있는 것이다.

     

    원인과 해결책을 말하자면, 대학원 시절의 이야기 속에 해답이 숨어있다. 모두가 평등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외가 되는 시스템이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예외를 없애면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가는 그 혜택을 꿈꾸며 노력해 온 과거를 부정당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가진 것을 빼앗긴다는 것에 불공정함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매우 난처한 무언가로, 그리고 다시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냉소 사회 - 8점
    김민하 지음/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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