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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로써의 과학과 당위로써의 과학
    2016. 7. 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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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물리 선생님이 빛은 입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파동이기도 하다는 설명을 들으며 순간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있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성을 지닌다는 말은 곧 입자가 파동과 같이 진동하면서 이동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 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뉴턴 역학에 기초한 물리학 지식을 배우고 그것을 경험으로 체득해 왔기에,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입자와 파동의 상보성에 대한 하나의 명제를 쉽게 받아 들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적 거부 반응은 현대물리학의 탄생과 발전 과정에서 겪었던 20세기 과학자들의 논의와 같은 방식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단지 몇 권의 책을 읽어 보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은 과학의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이어지는 논쟁과 관측, 플로기스톤에서 라부아지에의 화학혁명에 이르기 까지의 역사는, 마치 과학이 몰상식과 비이성과는 완전히 대립된 객관성의 총체이자 진리의 총아로 비춰진다. 덕분에 인간은 자기가 속한 역사적 환경에 크게 연루된다는 카의 주장처럼,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역사는 과학이 점진적 진리를 추구해 왔듯이 점진적으로 진보해 나간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과학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데 촛점을 맞춘 과학철학 저서들이나, 과학의 행위와 규범의 도덕성에 대해 촛점을 맞춘 과학사회학 서적들, 그리고 앞서 설명만 미신의 타파를 이끈 과학의 진보를 서술한 과학사 서적들을 읽고 있으면 과학에 대한 그 같은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


    과학의 이 같은 측면들이 있기에 과학이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과학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적어도 현대 과학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과학에 대한 인식 구조와는 다르게 작동한다.


    막스 베버는 과학자는 천성적으로 객관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베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귀납과 귀추, 연역 추론 등을 이용한 과학적 연구 방법을 과학자들이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방법에 의한 객관성의 담보라는 문장은 과학의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과학이 나아가야 할 혹은 지켜야 할 당위로써의 과학에 대한 서술과 다르지 않다. 


    과학은 이제 일부 부유한 지식인들의 취미 생활이 아닌 하나의 직업으로서 기능한다. 17세기 후반에 설립된  왕립학회와 과학아카데미를 기점으로 시작된 과학의 조직화와 전문화는 19세기를 거치며 전문 직업화 되어갔고, 양 차 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증대된 군사, 경제적 문제에 맞춰 거대화되며, 과학과 국가, 자본이 결합된 오늘날의 과학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이 속에서 과학자는 자연의 이치와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자 개인이 아닌, 하나의 주어진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직업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는 진리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가 아닌, 성과를 위한 논문을 쓰며, 보다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여, 더 나은 일자리와 더 높은 보상을 받기 위해 애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학부 시절에 있었던 일을 하나 고백해보자. 당시 강의 중에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학생과 함께 간단한 연구 과제를 한 학기 동안 수행한 뒤, 학기 말에 발표하는 일종의 연구 수업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3비트 반도체 소자로써 기능할 수 있는 한 세라믹 물질의 화학적 합성과 박막 제조 과정에 대한 연구를 맡았다.


    세라믹 물질을 화학적으로 합성하기 위해 이 방법에 대해 언급한 몇 편의 논문을 참고하여, 목표로하는 물질의 화학식과 조성비, 반응 과정, 환경, 시간 등에 대한 이론적 계산을 마친 뒤 실제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얻은 물질이 실제로 목표했던 물질인지 확인하기 위해 X-ray 분석을 해 보았더니 한 가지 문제가 발견 되었다.


    염산과 양잿물을 정확히 1:1 비율로 섞으면 소금물이 나온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둘을 섞으면 순도 100%의 소금물은 나오지 않는다. 반응에 참여하지 않고 남아있는 염산이나 수산화 나트륨이 있기 마련이며, 완벽하게 1:1 비율로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화학적 합성 과정에서 목표로한 물질의 순도가 100%가 나오지 않았다. 불순물은 산화철이었다.


    몇 가지 변수를 통제하고 불순물의 비율을 줄이기 위해 수 차례의 반복된 실험을 해 보았지만, 몇 가지의 변수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과제에 주어진 시간은 3개월 정도였으며, 이 때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서 보고서 작성을 하고 있어야 할 단계였다. 새로운 시료를 만들고 측정하고 분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촉박 했고,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아주 손쉬운 방법을 쓰게 되었다. X-ray 측정 데이터에서 산화철을 나타내는 작은 피크 하나를 다듬었다.


    단지 3학점 짜리 학점을 위해 그동안 스스로 믿어오고 신봉해 왔던 과학적 객관성과 진리의 추구는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실험실에서 측정 데이터를 논문에 보다 깔끔하고 보기 좋게 싣기 위해 원데이터를 다듬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흔히 과학자들은 과학자로서의 훈련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과학적 방법과 과학에 대한 이해를 체득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과학 훈련을 거치면서 체득하는 것은 앞서 말한 당위로써의 과학이 아니라, 통과되는 논문을 쓰기 위한 방법을 배울 뿐이다.


    수 천개의 과학 학술지가 발행되고, 매 달 수 만 편의 과학 논문이 게재되며, 누구도 읽지 않는 학술지에 누구도 읽지 않을 논문을 쓰며 학문적 업적을 쌓아 나간다. 그렇게 쌓은 업적으로 더 많은 연구비를 보장 받을 수 있고, 더 많은 연구원을 다룰 수 있으며, 더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싣고, 보다 나은 직업을 선택하고, 보다 나은 대우와 보다 나은 임금을 받으며, 언젠가는 스톡홀롬에서 초대장이 오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는다.


    이 과정에서 시간, 성과, 지위에 대한 압박이 과학의 객관성을 과학자 스스로가 파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키나제 캐스케이드 스캔들이 그러했고, 시토크롬C가 그러했고, 필트다운 인 사건이 그러했으며, 황우석 사건이 또 그러했다. 밝혀진 커다란 사건만이 아닌 일상적인 작은 조작 행위 역시 그리 드물게 일어나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론이나,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 철학자들의 설명 등을 해가며 과학의 이상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고 싶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직업으로써의 과학자의 모습은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쓴 윌리엄 브로드와 니콜라이스 웨이드는 이 같은 되풀이되는 연구 부정 행위의 원인에 대해 과학자들의 과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맹신 때문에 시스템을 건드리려 하지 않기 떄문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당위로써의 과학이 이념화, 이데올기화 되면서, 사실로써의 과학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해 수 만 명 씩 만들어지는 박사 학위 소지자들과 과학의 거대화, 자본화, 개량적 평가 시스템, 학술지의 착취 구조, 실험실의 비민주화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그 이상적인 과학이란 과학계 전체에서 지속되기는 결고 쉽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같은 시스템 하에서 과학을 지속하게 될 것이고, 과학의 발전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는 쉽기 않을 것이다. 진리 추구를 위한 과학 연구를 목표하지만, 연구비 지원의 장벽에 막힐 가능성이 높고, 보다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 보다 나은 학술지의 논문을 많이 실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다. 나는 왜 과학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 - 10점
    니콜라스 웨이드.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동광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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