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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2016. 6. 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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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 아래로 소를 끌고 가는 백성을 본 왕이 물었다.

    ‘소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피를 받아 종에 바르는 의식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를 놓아 주어라. 나는 그 소가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 마치 아무 죄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 같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백성이,

    ‘그렇다면 의식을 그만둘까요?’ 라고 되묻자 왕은,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느냐. 양으로 바꿔라’ 고 말했다.


    이 일이 알려지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이 소는 불쌍히 여기고 양은 그렇지 않아 대담하지 못하고 좀스럽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제선왕은 의기소침하여 맹자에게 나 같은 사람도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마음이라면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께서 소 한 마리가 아까워 그랬다고 하지만, 저는 왕께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러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곧, 국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주요 덕목임을 설파 한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임을,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바로 측은지심이라는 본능에 있음을 이야기함에도, 맹자가 선인으로서의 덕목으로 이를 지칭한 데는 군자 혹은 성인의 도리를 탐구하기 위해 상정된 이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기본의 본능과 선인의 덕목이라는 두 명제는 대단히 모순적이다. 이인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어떤 행위의 당위 여부를 규정하는 준거로서의 기능을 지칭하는데 반해, 본능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 인간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모순은 인간 내부에 엄연히 공존한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죄로 체포된 나치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보고서를 토대로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작가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눈에 아이히만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도 아니고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상부의 명령에 복종한 평범한 군인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 보다 명령을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쟁 중 누구도 유대인 학살을 거부한다고 해서 처벌받지 않았지만, 사회 전체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는 이를 정당한 살인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건강한 보통의 독일인이었다.


    미군정이 일본을 점령한 뒤 누가 일본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느냐는 질문에서도 역시, 특정 조직이나 인물을 찾아내지 못했다. 맥아더가 무죄로 결정한 천황을 제외하면, 나치와 가장 유사한 군사조직인 헌병대도 아니었고, 일본 신토나 천황숭배, 무술, 전시 경제 계획 등과 관련된 일반 애국주의 조직도 아니었다. 일본이 주도한 전쟁과 범죄들에 주된 역할을 한 조직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름의 사명감과 암묵적 분위기에 편승한 봉건적 관료제였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실시된 감옥 실험의 비극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악한 시스템은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 낸다. 비단 나치와 일제의 악행과 같은 극단적 상황만이 선한 인간을 악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은 그 평범성에서 살아 있게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의 정당성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월급 명세서로부터 나온다. 인권 문제는 그 사람의 국적과 그 나라의 GDP에 비례하여 지켜지며, 피부색과 성별 심지어 신장에 따라 구분되며 차등 되어진다. 반려동물의 생명권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며,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자녀의 생명의 값어치를 산정하고 차등 한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3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자발적으로 산아를 제한해야 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 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는 200여년 전 맬서스의 주장이 남긴 영향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티비에 비친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을 보며 그저 그들이 게으르고 열등한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교과서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이렇듯,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바닥까지 뿌리내린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에 의해 계급화되고 계층화되며, 그들의 상호 연대와 이동이 불가능한 서열 구조로 확립해 나갔다. 가정 형편이 조금 더 여유로웠다면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한 어느 정치인의 인식처럼, 자본의 끝없는 착취 구조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만든 사회 시스템에서 맹자가 이야기한 측은지심이 설 자리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왜 그러한 직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왜 사회의 부는 늘어나지만 개인의 부는 오히려 줄어드는 것인가? 국가의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왜 개인의 소득은 변하지 않는가? 개인의 무능 때문인가? 열등한 민족이기 때문인가? 보다 더 노력하지 않기 때문인가?


    1970년 1월 1일, 칠레의 좌파정당과 노동조합이 연대한 인민전선은 101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그 중 제1항은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들의 후보가 승리할 경우,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배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레의 시급한 사회적 과제 중 하나가 아이들의 영양실조였기 때문이다.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고, 인민전선의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36.5%의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아이들의 영양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칠레의 분유와 유아식 시장은 다국적기업인 네슬레가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옌데가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분유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네슬레와의 협약이 필요했다. 아옌데는 네슬레에 분유의 무상 지급을 주장하지 않았고, 적절한 가격을 제공하려 했으나, 1971년 스위스 베베이의 네슬레 본사는 칠레 민주정부와의 협력을 모두 거부했다.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그 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정책을 꺼리고 있었고, 칠레가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성을 높이고 국가의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정책이 만일 실현된다면, 그동안 미국의 기업들이 칠레에서 누려왔던 특권을 침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키신저는 칠레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운수 업계의 파업을 뒤에서 조종하고, 광산이나 공장의 태업을 부축였다.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매일 0.5리터의 분유를 배급하겠다는 공약은 수포로 돌아갔고, 1973년 9월 11일.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쿠데타를 성공하였고, 그날 오후 아옌덴은 살해 당했다.


    서구 열강들에 의해 구축된 경제 시스템은 워싱턴 합의에 따라 국가별 경제 계층 구조를 공고히 해 나갔다. 20세기 전반까지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시행한 식민지정책으로, 강제 노역에 따른 플레테이션 농업이 시행되었다.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 차드에서는 본국의 직물공장에서 쓸 면화만을 재배해야했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가나는 초콜렛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카카오만을 재배해야만 하는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이 같은 단일 경작 플렌트 농업으로 생산된 농산물은 대부분 수출되고, 정부의 수출 가격에 비해 매우 낮은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넘기며, 기생적 관료 시스템과 다국적 기업에 의한 경제 지배구조로 하에서 끝임은 착취가 자행 되어 나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의 경제는 1차 산업 만을 담당하는 국가와 2차 산업을 담당하는 국가, 그리고 첨단 산업을 담당하는 국가로 계층화 되며, 산업 발달로부터의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국제적 경제 질서를 완성했다.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국가들의 다국적 기업에 의한 끊임없는 착취 구조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제 이 착취의 구조가 대륙과 국가의 단위가 아닌 개인과 개인의 범위에 까지 깊숙이 침투해왔다. 헤나 아랜트가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 처럼, 경제적 착취의 시스템은 개인을 악인으로 변모시켜 나가고 있다. 연대와 공감은 사라지고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차별과 혐오주의만이 난무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쓴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 장 지글러는, 국제 기아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같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측은지심으로부터 나오는 연대의 희망 그리고 단순한 가여움에 기대는 지원이 아닌 정확한 정보 공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라는 루소의 말처럼 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수적이며 동시에 심도 있는 논의를 가능케 할 다양한 정보의 필요성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10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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