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선거 개표일만 되면 보게 되는 붉게 물든 지도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이 지도를 보고 놀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보통 생각 할 때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진보당와 민주당이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상식이고,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매번, 그 반대의 결과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왜일까?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분노는 들끓고 있지만, 나의 노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나의 자식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며, 나의 직장을 위태롭게 만드는 정책으로 무장한 정당의 지지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만일 당신의 연봉이 3억원이 넘는다면, 더 이상 과중한 부동산 세금이나 성가진 노동조합, 간섭 많은 금융 규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다 그들의 노고 덕분이다. 우리가 늘상 한탄해 마지 않는 그 계급 투표가 사라진 덕분에, 당신들은 엄청난 세금 징수에서 벗어나, 올해 롤렉스 시계 한 개 살 것을 두 개 사고, 스포츠카도 몇 대 더 살 수 있게 된 것은 다 그들 덕분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이러한 조롱 섞인 한탄은 우리가 진짜 궁금해 하는 그 질문에 근접할 수 있게 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계급 투표는 이성적인 사고와 지식들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개별적인 정책과 의제,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일상으로 바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책적으로 나를 얼마나 잘 보호해 주고, 정치인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힘써주는지는 그래서 큰 관심사가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심을 갖지지 않도록 만들어 냈다.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정책이 아니라 대단히 감성적인 목소리와 문화적인 반동이다. 대통령의 악수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노동당의 당원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옮음이라는 근거와 논리로 계몽하려는 좌파 지식인들의 싸가지에 분노한다. 철밥통인 공무원들에 대한 시기심은 진주의료원 철폐를 통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자신들 보다 월급 많이 받을 것이라 생각되는 금속노조의 파업에 귀족노조라며 손가락질하며, 여성 직원의 감금에, 고위직의 간통 사실에, 나의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먹인다는 사실에, 유족들의 보상금 요구와 대학 특례입학 소식에 분노한다.


가정에서 잃어버린 가부장적 권위의 원인을 청소년들의 과도한 게임 중독이나, 그들의 문화, 좌파의 세뇌와 선동 그리고 인터넷의 영향이라 여기고, 이를 금지하고 옥죄는 보수주의 정당을 지지한다. 높은 청년 자살률과 실업률의 원인은, 그저 젊은이들이 게으르고, 넥타이만 메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 시절엔 거리에 조폭도 없었고, 범죄도 없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때문에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경제 문제나 정치 문제를 제기하는 것 만으로 일반 대중들이 표를 찍으러 투표장에 가게 만들 수 없다. 그 같은 세세한 사항에 관심을 가지고 평가할 정도로 사람들은 여유롭지 않다. 미디어에선 외치는 목소리만 들릴 뿐,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분노와 시기심의 표출해야할 대상을 정확히 지목해주면서 감정적 공감대를 얻는다. 


그들은 그저 보수의 견지에서 예의 바르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자신이 오래전에 가졌던 이상이 이제는 끝났음을 한탄할 때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는, 자신의 탓이 아니라 이런 나쁜 조직과 사람들 때문에 라고 말해주는, 그런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해주는 정당을 지지할 뿐, 정책을 보고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보수정당은 정치, 경제적 쟁점을 문화와 이념 전쟁 속에 슬쩍 끼워 넣어 처리할 뿐이다.


여기에 진보정당은 중도노성을 선택하며 계급 투쟁과 계급 문제를 포기하고, 심지어 그들 스스로 경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부자들의 편을 들게되고,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계산기만 두드리는 것이 더해져 보수의 정치조작은 완성된다.


토마스 프랭크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정치 투쟁을 문화 투쟁으로 바꾼 결과로 설명한다. 정책적 논의를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치환시키며 얻은 표로, 민영화에서 부자감세까지 슬쩍 처리하는 보수정당의 집권 전략의 결과로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이 여촌야도나, 반계급 투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대구에서 택시를 탔던 기억이 났다.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에선 소방 헬기가 아파트에 충돌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기사님은 나를 보며, ‘이 집 주인들 땡잡았겠네, 집도 새로 고쳐주고 보상금도 받고 좋겠네. 허허’ 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식당엔 언제나 TV조선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함께 밥을 먹던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탁치며 ‘그래 저 놈들이 그렇지’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장악된 언론에 의한 세뇌라고 하기엔 너무나 감성적인 공감대였다. 하고 싶었던 말을 공신력 있는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 TV에서 대신 이야기해주었을 때의 공감대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토마스 프랭크가 캔자스의 사례로 설명했던 대로 정치, 경제적 쟁점을 돈, 문화의 쟁점으로 바꿔치기하는 전술에 야당의 무능력까지 더해진 것만으로는 절반의 이해 밖에 받지 못했다. 나머지 절반엔 어떤 요소가, 요인이, 목적이, 감정이 담겨져있을까. 그런 깊은 여운만을 남긴채 이 책을 책장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8점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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