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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년, 현대의 탄생과 지속에 대한 고민
    2016. 6. 8.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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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했던 일상과 사랑 했던 모든 것들이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녹턴은 고요한 서정성을 잃고 그리움과 슬픔, 고독에 사무치게 된다. 어쩌면 폴란드의 독립을 꿈꾸던 쇼팽의 애절하고 아련한 바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을 이 곡은, 스필만의 손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비로소 완성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 피아니스트는 전란 속에서 고통 받는 무기력한 개인을 묘사하며, 배타성은 그 고유한 개념에 따라 밀폐된 집단의 배타적 지배로, 결국에는 거대 산업 집단의 지배로 발전하게 되어 인간적 온기와 포근함이 폭탄처럼 산화하여 무로 화하고 만다면, 그것은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 대한 형의 미움으로, 유색인종의 이주를 금지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호주의 이민법에 의거해 어떤 한 신입생을 따돌리는 학생들의 집단 우정으로, 소수 민족을 박멸시키려는 파시즘의 형태로 곧장 나타날 것이라는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p111], 파편화된 개인과 야만성의 승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어떤 선한 물체조차 중력을 받으면 치명적인 흉기가 될 수 있듯이, 끊임없이 아래로 추락한 인간성이 남긴 전후의 흔적은 참혹할 정도의 기아와 복수심 그리고 공포였다. 이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1945년 이후의 해방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루스벨트는 언론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로 표현되는 인류의 기본적인 4대 자유라고 답했다. [이안 부루마, 0년, p402] 뉘른베르크 재판의 검사장이었던 로버트 잭슨의 말처럼, 우리가 피고인들에게 내린 판결의 기록이 미래에 역사가 우리를 판단하는 기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되며, 피고인들에게 독이 든 잔을 건네는 것은 우리가 독배를 들이켜는 것과 같기에 [Ibid, p320], 복수심에 사로잡힌 비이성적 과거로의 회기는 불가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과거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계급에 따라 주어지는 특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출신이 낮으면 적절한 교육과 주택,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그런 정상 상태로의 회기를 의미했다. 이러한 불평등 사회는 사회적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만들었고, 따라서 인구 1%가 전체 부의 50%를 소유하고, 군 장교 1%만이 노동 계급 출신이었던 [Ibid, p320] 과거의 불평등 사회는 전후 복구 과정을 통해 재설계 되어야 했다.


    1945년은 그렇게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동시에 사회적 계급의 폐지와 시민의 참정권 확대, 천부인권과 자유 등의 가치를 표방하는 현대의 탄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 많은 개인의 상처로부터 나온 현대의 성과는 지속 발전 가능할 것인가? 혹은 유지 될 수 있을 것인가?


    1차 대전 이전 수준까지 회복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자본의 위계 구조를 보다 강화하며, 개인의 경제적 운명을 무기력하게 종속하고, 끝을 알 수 없이 체계화된 경제적 착취 구조 속에서 또 다시 개인은 경직된 채 파편화 되어 나간다. 덕분에 평등을 추구했던 현대의 가치는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누구나 안전의 위협과 실존의 위협, 생존의 위협을 동등하게 받는다는 점에서, 인간 질의 박탈이라는 평등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선(gut sein)과 소유(gut haben)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라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그래서 폐부를 찌른다. 덕분에 사람의 가치, 친절함과 정의로움이란 그 사람의 은행 계좌를 뜻하며, 좋은 사람이란 그 사람의 지불 능력으로 대변된다. 소유가 절대적 선이 된 사회는 부도덕과 야만성은 소유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며, 부도덕을 재생산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p243-247] 


    경제적 경직성에 따라 파괴된 공동체는 파편화 된 개인 간의 소유에 대한 탐닉과 시기, 질투로 또 다시 파편화 되며 소유의 선이라는 종교적 허상을 보다 강화해 나간다. 인류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말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로부터 반증 되듯이, 여기에 또다시 배타적 지배 논리와 이데올로기의 그늘이 드리운다면 또 다른 파시즘이 재현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숨길 수 없다.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속된 논의와 이성적 판단을 위한 노력이 0년으로부터 뿌리내린 성과라면 이 같은 우려가 기우에 그칠지도 모르나, 이 역시 저자의 표현처럼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계속될 수는 없다. 




    0년 - 10점
    이안 부루마 지음, 신보영 옮김/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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