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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인문학 편지
    2021. 11. 9.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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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edits: NASA/JPL-Caltech

    과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이들에게,

     

    여러분은 혹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읽어 보셨는지요. 책을 읽어보진 못했더라도, 보이저 1호가 태양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송한 사진 한 장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광활한 우주 속의 작은 티끌과도 같은 우리 고향의 모습 말이지요. 그는 이 사진을 소개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크게 공감하거나 실감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구성원들의 특징과 성향을 하나하나 인지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평수에 따라 구성원을 구분하고, 동네와 지역을 세세하게 가르지만, 정작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 어느 국가의 국민들은 그저 아프리카 인이라고 퉁쳐서 말할 정도로 우리의 인지거리는 매우 짧고, 또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와 과학 사이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이미 우리 사회와 생활양식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고, 우리의 먹거리와 생존에까지 관여하고 있지만, 사회속의 과학은 마치 창백한 푸른 점처럼, 너무도 멀게만 느껴지거나 서로 무관한 것이라 여겨지는 까닭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류는 너무나도 많은 육류를 섭취하고 있고, 그 육류 소비의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축에게 먹일 어마어마한 양의 옥수수와 콩을 함께 재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가속으로 인해, 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지요. 지구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고 육류 소비 또한 줄일 수 없다면, 육류가격의 폭등을 감내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대안을 내놓았습니다. 실험실 배지에서 배양한 실험실 고기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곤충고기를 먹는 대안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육류를 먹어야 할까요? 인간이 먹을 곡물을 가축에게 양보하고 육류를 생산해야 할까요? 아니면 실험실 고기나 곤충 고기를 대안으로 선택해야할까요? 아,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서 먼 미래의 일 처럼 느껴지셨나요?

     

    조금 가까운 이야기를 해보죠. 우리는 환경 보호를 위해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해나가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산업 형태과 구성 때문에, 일순간에 재생가능 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징검다리로 오래된 화력 발전소 10개의 가동을 중단하는 대신, 우리 동네에 원자력 발전소를 새롭게 건설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번엔 사례가 너무 극단적이었나요? 그렇다면 주변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죠. 과학과 기술이 고도화 되고 전문화 되어, 개개인이 과학이 전해주는 모든 맥락을 파악하기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의 연장된 실체로서의 과학이 아닌, 추상적 관념으로 주변화되고, 결국 주관적인 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관적인 것은 기호의 문제로 쉽게 치환되고, 정보는 요원한 것이 되어 공포와 환멸, 몽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는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GMO 식품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양산하거나, 전자파 공포로 태양광 발전을 비판하고, 거짓 지구온난화와 지구 평평설을 주장하는 모습들로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조금 실감이 나시나요? 연결은 언제나 부재와 충돌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인터넷이 공기과 같을 때 단 10분이라고 인터넷이 사라지는 시간을 겪는다면 우리는, 그 사이에 존재했던 무수한 연결 고리들과 의존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감염병 역학을 서술하던 기존의 이론과 실천들은 새로운 감염병 앞에서 충돌하고 실패하며,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맙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재의 순간과 충돌의 시간이 지나가면, 언제나 사회는 다시 수정된 보편의 가치로 안정화 되고 사회 속에서 기능해 나갑니다. 

     

    과학은 이렇게 사회 속에 구성되어 있고, 늘 그 속에서 충돌하고 수정되어 발전하고 다시 사회 속에 녹아 듭니다. 그렇게 녹아든 과학은, 사회 속에서 보편 기준의 준거로 기능하여 다시 사회를 움직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환경 문제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입니다.

     

    우리는 이제 지구가 우리의 고향인 것처럼, 과학도 우리 사회의 동반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눈에 보이지도 않은 동반자와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과학적이 되어야 할까요? 사회의 과학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구획화하여 비과학을 배재한 사회로 재구성해 나가야 할까요? 질문에 어패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아실 것입니다. 

     

    자, 다시 처음 칼 세이건의 말을 인용한 순간으로 되돌아 가 봅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 모든 일들, 모든 지식들, 의견들이 사실은 모두 과학입니다. 과학은 절대 보편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습니다. 과학은 언제나 당시의 사회 속에서 구성되고 영향을 받으며 수정, 기각, 발전해 나갑니다. 과학이 언제나 진보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험과 검증, 예측, 보편성, 재현가능성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방법론의 기준을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는 언제나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논쟁이 수반 되며, 때로는 합의에 의해 하나의 과학이 정립 되기도 합니다. 정립된 과학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또다른 싸움이나 오류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죠.

     

    지금까지 저는 과학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구성되어 있는지만 설명 하느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주체 하나를 빼먹었습니다. 바로 시민의 역할 입니다. 앞서 실험실 고기와 곤충고기를 예로 들었는데, 우리의 식탁에 오를 육류의 종류를 누가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가축에게 먹일 식량을 위해 농지를 늘리는 결정은 누가 합니까? 소수의 정부 관료가? 그것을 개발한 일부 과학자들이? 정치인 몇명이? 우리 동네에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또 어떻겠습니까? 사회와 과학 사이에는 언제나 시민이 있고, 이 둘은 시민에 의해 접합되고 기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짧게 줄인다는 것이 그만 지면을 많이 써버리고 말았네요. 시민과학의 필요성과 역할, 방향성, 그리고 성과에 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편지를 쓰도록 하지요. 혹시 그 전까지, 현대 과학과 사회, 인문학과 과학, 정치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를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우정을 담아서…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10점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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