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휼륭한 과학자란 어떤 과학자를 말하는 것인가? 마치 수도승 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연구실에 오랜시간 앉아 연구를 거듭하며 과학적 성과를 보이는 것, 좀더 나아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 좋은 과학자인가? 아니면, 한 명의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공헌 또는 활발한 사회운동의 참여가 좋은 과학자인가?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교과서는 과학을 객관적이고 가치 중럽적인 지적 추구의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문화적, 사회적, 정칙적 영향 및 과학 발전의 사회적 영향과 결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도 없이 과학을 배운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는 생략하고, 과학을 진리를 향한 부드럽고, 불가피하며, 거의 오류가 없는 전진의 표상으로 여기며, 아직 발전시킬 여지가 많은 지적 추구의 대상 혹은 행위로 인식시키고 있다.

과학의 가치중립화 그리고 경제학과 국가주의가 섞여있는 국가주의 과학, 대중과 미디어에 의해 표상되는 과학 발전의 국가주의적 관점화는 과학의 사회 참여에 비판적 인식을 드리우며, 사회적 맥락성을 상실한 이상주의적 과학관을 추구하게 된다.

휼륭한 과학자란, 과학자라는 훈련을 성실이 마친 과학자에게 훌륭한 과학자란 가치중립적 관점에서 과학 연구의 추구가 곧 훌륭한 과학자를 역설한다. 때문에 과학자 개인은 사회적인 맥락성을 모두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과학을 고민하고 논할 필요성까지 느끼진 못한다. 아니 않는다.

최근에 벌어졌던 한국 사회의 과학적 논란이 핵심이었던 두 가지 사건을 경험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이 그것이고, 천안함 침몰의 원인에 대한 이슈가 그것이었다. 대중은 과학을 잘 모른다. 대중은 그들 나름대로 바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 설사 그것이 나의 식탁 위에서 벌어지는 문제나 친구나 가족에게서 닥친 현실의 문제라고 할 지라도 과학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알아야 할 필요성은 없다. 때문에 전문가들의 설명과 미디어, 정부의 주장에 귀 귀울일 뿐이다.

과학적 문제가 중심이 된 사회 문제에 대답해야하는 것은 결국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처럼 보여진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비판받는다. 사회적 논란이 있을때 해당분야 전문가들이 나와 설명하고 오해를 푸는 적극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지식인으로써의 역할을 다 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 오게 된다. 좋은 과학자, 훌륭한 과학자란 어떤 과학자인가? 무엇이 좋은 과학자이고, 무엇이 나쁜 과학자 인가? 이것을 구분하고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연구보다 사회에 적극 나서는 과학자를 좋은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문득 프랑수아의 질문이 떠올랐다. ‘과학에서의 사회적 쟁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해 온 과학자들이 사회적 피해를 예방하는 데 성공을 거둔 적이 있었는가?’

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한 권 있었다. 인문학의 부제와 결핍 속에서 누구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정의의 결핍 속에 살아가는, 어쩌면 상식의 부제 속에 살아가는 대중의 갈증에 대한 한 모금의 물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란 자원의 분배라는 간단하고도 명확한 명제에서, 경제학의 논리를 들이데면 곧바로 빨갱이라는 소리가 되돌아오고, 헙법 119조를 이야기하는 것에서도 빨갱이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22조원의 삽질과 24조원의 빚더미를 안긴 삽질 전시행정 보다, 기회비용보다, 정치비용보다, 1% 수준의 예산 편성에 나라가 망한다는 소리가 절대적 진리와 가치처럼 되어버리고, 탈법과 탈세와 병역시피가 기본 소양 과목으로 인식되며, 자본이라는 계급 아래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아야하는, 이렇게 우리는 상식이 난도질 당한 비상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대중은 냉소한다. 프랑수아가 던진 질문은 비단 과학의 사회적 쟁점 참여의 결과가 어떻했는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종북좌파들을 부르짓는 미국종복자들에게, 마치 4가지의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을 분류하는 것과 같은 좌파와 우파의 논쟁 속에서 상식인이 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비상식의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 타자로서의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대중은 다시 한번 냉소한다.

과학자는 지식인의 가치를 가지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위치는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진다. 과학자는 지식인이지만 전문가로서의 지위가 아닌 피고용자의 위치에 서게된다. 넘처나는 과학자 속에서 숨을 붙이고 살아남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것이 이 바닥이기도 하다. 따라서 과학자는 을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구조적 형태와 한계를 가진다.

냉소와 구조 속에서 선택권은 얼마나 있는가? 단순히 과학자의 윤리의식만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언어폭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가지는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어느날 책장에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다른 할꺼리들이 많다든지, 시간이 없다든지, 피곤하다든지, 잠이 많다는 든지 하는 핑계들에도 자신도 모르게 책장에서 이 책 한 권을 다시 손에 집어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을 들을 수 있기 않을까란 작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이 책의 저자인 존 백워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서는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나의 과학 영웅인 프랑수아 자코브의 현명하게 절제된 표현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어느 정도의 지침을 제공하고 특정한 가설을 제외시킬 수는 있다. 과학의 추구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이 정도면 나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하다.”

그의 주장은 다소 급진적이다. 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며 과학의 윤리에 대해 되묻고 있다. 또 과학과 사회활동은 동시에 추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함께 추구해야 과학적으로도 의미있는 업적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학자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만이 곧 훌륭한 과학자라 할 수 있는가? 훌륭한 과학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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