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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생각, 나의 글
    사념 2014. 6. 1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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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적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릴 때면 언제나 초록색 언덕에 나무 몇 개를 그리고, 집을 그리고, 구름과 햇님을 그려 넣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화창한 날 숲 속 별장의 차분하고도 활기찬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의 손에 의해 한 폭의 그림으로 담기는 순간이었다. 나의 풍경화 작품 n호는 대충 이런 모습이었다. 



    들판을 자유로이 뛰어노는 양때들과 나무 두 그루, 사이의 아늑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오지만, 나는 이렇게 생긴 집이나 양, 나무, 태양, 꽃, 들판 심지어 이런 모습을 한 풍경을 본 적이 없다. 갈색 직사각형 위에 초록색의 삼각형이 얻혀져 있는 모습을 한 나무를 나는 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나무라고 인식하고 지금도 여전히 수 많은 어린이들은 이런 비슷한 그림을 집에서, 유치원에서 그리고 있다.


    이러한 경향성은 나의 풍경화 작품 n호가 인류에 미친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의 결과가 아니다. 체스에서 말의 모양에 따라 퀸과 킹, 폰, 나이트 등으로 구분되어지고, 장기의 말에 적힌 글자로 왕과 차, 포를 구분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에서 볼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 방법이다.


    두 가지 색과 두 가지 기하학 도형의 결합 만으로 이것이 나무 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도형에 칠해진 색을 서로 바꿔 칠 했을 때 느끼는 어색함은, 우리가 나무에 대한 추상적인 형태를 하나의 형태로 개념화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인식 수행에 있어 개념이라는 장치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식수행 과정이 개념에 의해 제한받게 된다.

    무엇인가를 개념화 한다는 것, 즉 ‘나’가 아닌 다른 대상을 개념화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나와 분리된 객체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규정짓고, 재단하여 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 자연을 통제와 지배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는 다른 것보다 우월해야하며, 다른 것보다 우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것으로 인간은 나와 다른 사람, 자연을 경계지우고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 분리와 사유의 도구는 다름 아닌 이성이며, 어떤 의미에서 서양의 합리성은 이러한 도구적 이성을 점차 강화시켜 온 역사이다. 서양철학의 오만과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 접한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계층적 계급구조는 상위 계층의 이름으로 하위 계층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근대 과학주의와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이같은 인식의 도구이자 개념은 숫자와 돈으로 완전히 환원된다.


    개인의 가치는 그 사람의 인성과 인격, 성격, 외모, 인간관계가 아닌 연봉이라는 숫자로 환원되고, 상품의 가치는 상품이 가진 질적인 가치를 배제한채 그 상품의 가격으로 환원된다. 자연의 가치는 지하자원의 매립양으로 환원되며, 인권과 기본권은 GDP라는 숫자의 가치로 재단된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이다. 그는 이 그림에 파이프를 그려넣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어두었다. 마그리트가 그린 이 파이프는 1차대전에 참전한 세 아들들의 전사 통보를 기다리며 피웠던 비운과 슬프이 담긴 파이프다. 그러나 이 파이프 그림 속에서는 그 어떤 비운과 슬픔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담배를 피우는 도구로써 개념화되어있는 그 파이프의 모습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다.


    돈과 양의 숫자로 개념으로 환원되는 자본주의적 인식 체계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도, 자연도, 그리고 나 자신 마져도 배제시킨다. 상호 관계성은 배제되고, 자본이라는 주체와 그것이 아닌 객체로 철저히 분리된다. 때문에 ‘나’라는 주체는, 사람은 파이프 그림 속의 파이프 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개념을 파괴하고, 그 양화와 환원의 상징인 돈을 당장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또다른 전유의 폭력이자, 내용없는 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다.


    독일어의 관계하다는 의미의 단어 teilhaben이 teil의 haben, 즉 부분은 나눠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 서로 관계 한다는 것은 서로 공통적인 부분을 가져야함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개념화하고 객체화한 대상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는 순수한 타자라면 서로 관계할 수 없다. 서로 관계한다는 것은 서로 공통적인 부분을 가져야한다.


    만일 인간이 자연과 어떠한 공통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연과 관계할 수 없으며, 인간과 자연이 철저한 타자라면 인간과 자연은 서로 관계할 수 없다. 이 둘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양자를 통해 매개되며, 서로 상호성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대 자본주의와 과학주의로부터 자연을 나아가 인간을 통제하려는 발상은 그래서 퇴행이다.


    중요한 것은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파이프’가 배제시킨 다른 것들이다. 내가 인용하기 좋아하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처럼, 자기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나르키소스나 수동적으로 타자만을 탐닉할 수 밖에 없는 에코의 길이 아닌 상호성의 관계, 지배없는 존중과 배려다.


    융합이나 통섭 따위의 논의가 과학과 인문학 모두를 섭렵한 수퍼맨적인 인재를 목표로하는 것이 천박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리학자가 인문학을 단지 시대적 유행에 따라 공부하는 것이나 이를 요구하는 것 모두 무의미하다. 통섭과 융합은 상호 관계성 속에서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시작하는 소통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파이프’와 파이프 사이의 관계와 그 상호성.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나와 우리. 나의 생각과 관점, 인식, 해결책에 대한 사고, 사유는 이런 시각에 기초해있다. 아니, 노력하고 있다.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을 블로그를 통해 수년째 글로 옳기고 정리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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