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한때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펴낸 조지프 니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과학과 문명의 발전 양태를 기록하고 포괄하여, 현재와 과거의 연결성과 사상적 풍경을 조망해 보겠다는, 그런 야심 차면서도 허황된 꿈을 꾼 것이다. 그 대상이 한국도 아니고 동아시아 전반에 관한 것고 아니라 일본으로 특정된 데에는 일본에서 경험한 하나의 병리적 경험에 그 원인이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바라보며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지 한 달여 만에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는 원자력발전의 지속적인 추진과 확대를 주장하는 현직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나 원전이 밀집되어 있는 홋카이도와 후쿠이, 시네마, 사가 현 등의 지사는 물론이고, 후쿠시마로부터 불과 240km 남짓 떨어진 도쿄 도지사 당선자 역시 강력한 원전 추진론자 중 한명이었다. 도쿄 도지사에 연임한 이시하라 신타로는 사고 직후 후쿠시마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원전 추진론자이다. 원전을 반대하는 정체불명의 패거리들이 후쿠시마에 몰려가서 데모 같은 것이나 하고 있지만” [1] 이라는 망발을 내놓은 후에 치뤄진 선거였기에 이러한 결과는 당혹감을 넘어 충격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그렇다면 선거결과가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원전 사고 이후에도 원전의 재가동과 건설 확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방 선거가 있고 2개월 뒤에 이루어진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 [2] 에 따르면, 74%의 국민이 원전의 단계적인 폐기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2011년 8월 6일에 열린 제12회 일본원자력학회 심포니엄에서는 도쿄 전력, 칸사이 전력 그리고 전기산업연합회 원자력 부장 등이 참석해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개선사항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선 핵심적인 안전성 개선이나 여과 배기구와 같은 안전 설비의 증축에 관한 논의 보다는 원전 축소를 주장하는 외부인들의 주장에 변명하기 급급했다. 발표에 오른 한 기술자는, “세계를 둘러보면 앞으로 원자력 발전소 없이 가능한 나라는 부자 나라 혹은 석탄 등 다른 에너지원이 풍부한 나라뿐입니다. 일본은 그중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를 늘리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변경하고자 한다면 원자력 발전을 완전히 중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많은 이들은 한결 같이 “자동차는 수많은 사고 희생자를 내는데도 폐지하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한 사람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이 정도의 사고로 기죽지 마라”는 식의 언변을 늘어 놓기도 하였다. [3]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사고 후 정부로부터 조직된 원자력 발전 사고조사위원회는 법학부출신의 관료들로 조직되었다. 조사의 진행 방향은 책임의 추궁이나 관료사회의 무사안일로 인한 대처 미흡, 행정적 결함 등의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조사위원의 구성처럼 누구에게도 책임 묻지 않았고 또 그러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4]


당시 일본의 TV광고나 공공 광고물에서는 연일 “힘내라 일본!”, “일본은 강한 나라다!” 등의 구호가 넘쳐나고 있었다. 일본의 국책사업으로 추진된 원자력 발전소가, 사고로 전세계의 환경과 인류에 불가역적 해를 가한 가해자임에 대한 자의식과 비판은 존재하지 않았다. 재난과 고난이라는 피해의식을 공유한 감성적 공동체 의식 위에 다시 한번, ‘하나의 일본’을 선전 구호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고 이듬해부터 일본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개인적인 경험담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탈원전과 반핵 시위가 곳곳에서 보이긴 하였지만 그것은 소수에 불과할 뿐이었고, 대체적인 분위기는 ‘어쩔 수 없다’, ‘힘 있는 자들을 따라야한다’ 거나 ‘과거에 책임을 묻기 보다는 힘을 모아 미래로 나아가자’는 식으로 원전사고에 대해 선을 긋고 있었고, 이에 맞춰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인 닛코 도쇼구에 있는 세 원숭이 조각상들처럼, 일본사회에 떠도는 어떠한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었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백래시


재일조선인 도쿄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의 서경식 교수는 수업시간을 통해, 과거 일본 정부나 군부가 저지른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에 대한 설명에 뒤이어, 이 문제에 대한 감상문을 학생들에게 적어보라고 시킨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5]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학생은, “냉정한 인간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과거의 식민지 지배는 이미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일본만이 책임자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일본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금 전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사람들 중 어느 정도가 생활도 안 될 만큼의 궁지에 몰려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일본인의 생활도 걸려있는 것이다.” 라고 감상문을 작성해 냈다고 한다. 또 어떤 학생은 다음과 같은 감상문을 남기기도 했다. “사람 중에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국가라는 것도, 모든 국가가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비뽑기에서 운 나쁜 제비를 뽑은 일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쟁 책임을 추궁하려는 사람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서경식 교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이같은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일본이라는 국가와 나를 동일시 여기는 국가주의와 집단주의 의식으로, 과거 일본 정부의 비난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침략전쟁 시대를 지낸 윗세대들의 잘못을, 그 사실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이 인식하기 어려운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 여기에 덧붙여 일찍이 구미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명 개화를 이루고 서양 열강에 합류 할 수 있었던 일본과 그렇지 못했던 뒤쳐진 조선이라는 특권의식과 차별의식이 기저에 숨어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이러한 특권의식과 차별의식은 일본 제국의 수탈을 경험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이나, 재인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만 국한되는 것은 역시 아니다. 그 대상은 서경식 교수의 분석처럼, 자신 혹은 국가의 중요도나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낄 때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가까운 예가 바로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때, 아사히신문이 2017년 12월 26일부터 1월 17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8.9%가 미투 운동에 대해 공감(75%)하거나 공감하는 편(13.9%)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토양은 부정적으로 내다보았다. “일본 사회는 추행 등 성폭력 피해의 목소리를 내기에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92.9% 였다. 세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75.6%, “그렇지 않은 편”이 17.3%의 비율을 보였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유를 묻자 “비방이나 중상을 받는 등 다른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33.8%), “폭로를 해도 피해자의 치료와 가해자의 처분 등 적절한 대응을 기대할 수 없다”(28.6%) “‘약간의 성희롱은 참아야 한다’는 풍조”(18.9%)라는 대답이 차례를 이었다. [6]


실제로 몇몇 친구들에게 성추행 경험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전철과 버스안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빈번히 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피해사실을 알릴 수 없는 것은,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성폭력행위를 폭로해도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 2차 피해를 받는 일이 비일비제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TBS 워싱턴지국장이자 아베 총리의 최측근인 야마구치 노라유키로부터 강간당한 사실을 폭로한 이토 시오리 기자는, 중학생 시절 수영장에서 성희롱 당한 경험을 그 자리에 있던 친구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을 때 되돌아온 그 말을 잊지 못한다. ‘너가 귀여운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거야’ [7]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난 주관성으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일본은 집단주의적이며 전체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다. 쇼토쿠 태자에 의한 ‘17개조 헌법’ 이래로 일본인의 몸에 배인 ‘와의 정신’ 즉, 서로의 비난을 삼가는 사고는 공적 영역에서 과거의 잘못을 책임지지 않은 관료를 탄생시켰고, 봉건시대 부터 간직해온 ‘힘있는 자에게 머리 숙여라’, ‘참아라’, ‘어쩔 수 없다’ 는 생각에 더해 폭주하는 관료 독재 사회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국가와 가족, 개인을 등치 시키는 강력한 국가주의가 더해지며 ‘하나의 일본’이 되살아 난다.



하고 싶은 것, 어쩌면 할 수도 있는 것


일본의 과학은 외견상으로 견주어 보면 유럽 못지 않은 과학 강국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지표중 하나가 노벨상 수상자의 수이다. 이 지표로 보면 외국 국적의 일본계 과학자의 수까지 포함함하여 모두 23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실상부한 과학 강국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은 강력한 관료주의 국가이며 동시에 강력한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또 내포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병리적인 대치일 수도, 어쩌면 동등한 등치 관계 일지도 모르는 이 둘 사이에서 바라본, 오늘날의, 현대의 일본 과학의 모습이 그 허황된 꿈을 꾸었던 계기였다. 과거 일본 과학계의 고속 성장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과학기술의 개발경쟁에 일급 과학자들이 내몰리기도 하였고, 731부대의 악행에 가담한 의학자도 있었다. 원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과학자들이 행정 관료의 허수아비로 전락하여 사고의 참화가 빚어지기도 했고, 과학계 내부의 알력과 불화도 있었다. [8] 그리고 드는 질문은 이것이다. 현재 시점에서의 일본 과학은 어떠한가. 


일본의 과학은 이 반목과 혐오, 전체주의의 망령 속에서 과거와 같이 순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같은 토대 위에 올려져 있기에 더더욱 순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것과 전혀 무관하게 일본의 과학은 작동할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그리고 한때 꾸었던 야침차면서도 허황된 꿈을 조금이라도 실현 시켜보고자 작은 시도부터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일본의 근현대 과학 전반에 절친 조망을 하기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우선 가장 가까이에서 ‘일본의 중력파 연구 과정과 중력파의 검출을 위한 지속적인 도전’에 관한 역사를 우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련 과학자들과 종사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일본의 거대과학 연구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승인 받아, 진행되는 과정 사이사이에 들어오는 관료의 그림자와 돈의 흐름까지 소상히 들여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어만 다른 한국의 현실과 대치하여 봄으로써 한국 과학의 미래에 관한 논의 역시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작은 시도가 결국 실패하거나, 낮은 수준의 담론 차원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또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말하는 데로 이루어 질지도 모르기에 그런 기대를 이 글에 담아본다.




[1] http://www.jcp.or.jp/akahata/aik11/2011-03-29/2011040104_06_0.html

[2] http://www.asahi.com/special/10005/TKY201106130401.html

[3] 坂田昌一, 原子力をめぐる学者会的責任, 岩波書店 

[4] 福島原子力事故調査報告書

[5] 서경식, 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반비, 2012

[6] 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37026.html?_fr=gg#cb

[7] 이토 시오리, 블랙박스, 미메시스, 2018

[8] 고토 히데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부키, 2016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