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최고존엄의 지지율이 50% 대를 상회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술집에서, 식당에서, 역에서, 버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문득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되었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한 손에 쥐고 무엇을 선택 할 것인지를 묻던 매트릭스 속의 한 장면을 보며 무엇을 느꼈는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장면의 비유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떠올렸을 수도, 어쩌면 이 둘 모두인 동굴 속에서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결국 네오는 어떤 약이든 선택하기를 강요받지 않았는가.


자, 여기 배가 한 척 있다고 해보자. 선장은 선원들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지만 나이가 연로하여 귀먹고 눈도 잘 보이지 않으며, 항해에 대한 지식도 변변치 않다. 선원들은 서로 키를 잡겠다고 다투지만 그들 또한 항해술에 별다른 지식이 없다. 지식이 없으므로 이들에게 누군가가 항해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잡아먹을 듯이 기세가 등등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 없이도 지금까지 배를 잘 운항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잘 모르면서 참견하지 말라고. 


간혹 선장이 이 사람의 말에 귀 귀울이면서 선원들의 요구를 응하지 않을 듯 하면, 그 사람을 처치해버리거나 선장을 협박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식으로 배를 장악하고 선원들은 자기 욕심껏 배를 불리며 자신을 도와준 다른 선원들을 훌륭하다고 치켜세우기도 할 것이다.


반면 자신의 행동에 반대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선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놀아 낼 것이다. 항해를 제대로 하려면 계정리나 일기, 천체, 바람 그 밖의 다양한 기술에 대해 알고 연구해야함에도 그들은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배를 얼마나 잘 운항할 것이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진짜 항해술을 가르치려는 사람 혹은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얼간이로 매도된다.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선장의 탓일까? 지배받기를 원한다면 지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아나서야 하나 그렇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했던 선원의 탓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를 등용하지 않은, 혹은 그 같은 선장과 선원을 고용한 위정자들의 탓인가? 어쩌면 항해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틀렸고, 선원과 선장의 말이 옳은 것은 아닐까? 항해술이라는 지식은 참인가? 항해술이라는 지식으로 대중을 등에 업은 그들은 선한가?


무엇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앞서 튜링 테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기계는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고방식을 컴퓨터를 통해 재현하고자 하는 인공지능 학문의 출발점을 제시한 선구자가 바로 앨런 튜링이다. 튜링 테스트는 그가 제시한 인공지능의 판단 기준이다. 


이 테스트는 인간, 기계, 심판관의 세 주체가 참가하여 심판관은 인간과 기계를 시각적으로 구별하지 못하도록 분리되어, 텍스트 채팅만을 통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해내는 테스트이다. 만일 이 테스트를 기계가 통과했다면 그 기계는 인간의 지능을 가졌다는 것이 튜링의 주장이다. 이 튜링 테스트의 핵심은 이것이다.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내재된 명령들을 변경하며 동작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과 이해 과정과도 맞닿아있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는 술을 마시며 어떤 술의 향과 맛, 도수, 농도 등을 바탕으로 그 술을 평가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코가, 눈이, 카리스마가, 됨됨이가 등의 이유를 늘어 놓을 것과 같이 선택과 판단에는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 사유가 존재한다. 이것은 정의나 불의, 선이나 악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다.


매트릭스의 그 장면, 선택을 강요받은 네오의 앞에 놓여진 그 상황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고 과정으로 이해 되어오던 것, 판단에는 경험이나 지식과 같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는 가장 일반적인 가정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선장은 절대 악이며 이들의 고용한 위정자들은 불가항력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직장생활 사회생활 하다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와 같은 의견들이 각 개인의 사유과 경험, 지식으로부터 얻어진 의견이 아닌 일륜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문장으로 정형화되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논리나 의견 역시 하나의 일관적이고 일륜적인 하나의 목소리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판단의 가치와 기준은 사유가 아닌, 크게는 어떤 정당을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의 여부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어느 한 부분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며, 작게는 자주 보는 언론사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한 편으로 선택, 고정시키 버리고 있는 것이다.


감성적 이해는 히틀러도, 독재자도, 살인자의 살인행위도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으나, 이같은 행위는 그 어떠한 판단의 정당성과 합리성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같은 시기에 골프나 치러 다닌다거나 요즘같은 시기에 야구 응원이나 하고 있다고 욕하는 파시즘적 행태를 삼겹살에 소주 먹으며 말하는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정확히 두 가지로 분류된 사유없는 맹목적인 판단. 그 의견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부터인가 이같은 두 부류의 맹목적인 판단만이 이 사회를 휘젓고 있는 같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사유하지 않는 대중의 잘못인가? 빨간약은 만든 사람이? 아니면 파란약을 만든사람? 그 약을 건내는 사람? 아마도 그것은 그 두 약을 건내게 만든 시스템 전체의 문제일 것이다.


사유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요즘같은 자본주의시대에 이 시간은 돈으로 곧장 환원된다. 특히 이 돈과 시간의 등가교환 가치가 시간보다 돈에 더 높게 측정된 사회라면, 다시말해 투입된 노동시간의 가치보다 더 적은 보수를 댓가로 지불하는 사회라면 시간의 할애는 사치다. 특히나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생각하고 사유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사치행위이자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규정된다.


흔히 말하는 저녁이 없는 삶이 우리의 사유하는 여유, 판단하고 의견을 산출해 낼 수 있는 시간을 박탈해가고 있다. 사유 없는 판단은 맹목적일 뿐이다. 눈먼 장님이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이같은 시스템이 유지되고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누구의 이득을 위해서일까? 우리는 왜 점점 더 바빠지고만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언제쯤 다양한 의견이 분열이라는 이름이 아닌, 개별적 가치로써 무대 위의 토론의 장에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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