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부동산이란 무엇일까. 사회는 진보하고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해가며 인권을 넘어 동물권을 논하는 확장되는 도덕의 영향권 아래에서 조차, 땅 만큼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보다 우선시 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개인과 국가,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토지는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가치를 뽐내며 자본과 노동을 잠식해 나간다. 자본이라는 추상물과 인간의 욕심이라는 본능과 결합 하면서 자연물에 불과한 토지는 부의 상징이자 잠식의 도구로써의 상징을 완성해 나간다. 토지개발을 명목으로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간 수많은 목숨들을 보라. 부동산 투기 열풍에 휩싸여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라. 집값이라는 허상을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되는 저들의 단결력을 보라. 토지의 가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노동력의 값어치를 비교해보라. 우리의 도덕법칙과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사회가 눈부시게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리고 주기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한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지대를 징수하여 최우선적인 세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조지 핸리의 진단이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진보와 빈곤을 쓴지 130여년이 지난 오늘날, 문장 하나하나에 울분이 서려있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려 이곳에 몇 자 옮겨 본다.



p519


철도, 일간신문, 전보 등을 지니고 있는 현대문명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지만 분명히 사회의 기초는 우리 눈 앞에서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각종 문헌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미개상태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믿음을 불어 넣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과거의 미개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는 징후가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야만의 한 가지 특징은 신체와 재산에 관한 권리의 존중도가 낮다는 점이다. 우리 앵글로색슨계 조상의 법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처벌로서 피살자의 계층에 따라 벌금을 다르게 매겼으나 오늘의 법은 계층에 따른 차별이 없고 피살자의 지위의 고하나 지산의 빈부를 막론하고 살인자는 다같이 사형에 처하고 있다. 이것이 야만과 우리 문명의 차이를 나타내는 증거이다. 또한 과거에 해적행위, 약탈행위, 노예거래, 협박행위 등이 정당한 직업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 그 당시가 미개한 시대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런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우리 법이야 그렇게 되어 있더라도, 사실상 돈을 많이 가진 어떤 자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 한다고 할 때, 인구와 사업이 번창한 큰 중심지에 가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고 사직당국에 자수할 경우에 백중 구십수는 일시적인 구금을 당하는 정도 이상의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고, 다만 일부는 자시 재산에 비례하여 또 일부는 피살자의 재산과 지위에 비례하여 얼마간의 손실을 입을 뿐이다. 게다가 살인자의 돈은 보호자를 잃은 피살자의 가족이나, 시민을 잃은 국가에 돌아가지 않는다. 소송을 지연하고 증인을 세워 배심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아는 변호사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도독질을 크게 하는 자는, 훔친 것의 일부를 잃는 정도의 처벌밖에 받지 않게 된다고 확신할 것이다. 또 도둑질을 크게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한 밑천 남길 수 있는 자는, 마치 바이킹이 항해를 성공리에 마쳤을 때처럼 동료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자기를 믿어준 사람의 재산을 털거나 과부와 고아의 재산을 털더라도, 많이만 털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부를 안전하게 자랑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부의 분배가 가장 불평등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며 불평등이 심할수록 더 뚜렸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정의가 파괴되는 예는 모든 분야에서 사법제도가 무능력해지고 있는 현상의 하나에 불과하다. 차라리 법을 폐기하고 제일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경비위원회 같은 기구를 조직하여 스스로 사법제도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상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지적하기를 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민주제도가 완전히 발달한 사회에서 민주제도에 대한 믿음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한 때 국가적 행복의 근원이라고 신뢰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생각있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극복할 수 있는 방법까지는 알지 못하며, 제퍼슨의 견해를 불신하고 머콜리의 견해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국민은 전반적으로 부패의 증가에 익숙해져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불길한 징조는, 사람들이 청렴한 공직자가 없다고 생각하며 또 청렴한 공직자가 있다면 이는 자기의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즉 국민 자신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미국의 공화정부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과정을 밟아 나가고 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추세의 결과가 무엇이 죌지를 분명히 알 것이다. 부패가 만성화되고, 공곰심이 소멸되고, 명예와 선행과 애국심의 전통이 약해지고, 법이 무시되고, 개혁의 가망이 사라지면, 고통받는 대중 속에서 화산과 같은 힘이 생겨 어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회를 산산조각 내고 만다. 이런와중에서 강력하고 분별없는 자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대중의 맹목적 욕구 또는 대중의 광포한 열기를 이용하여, 이미 활력을 상실한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제쳐 놓게 된다. 이렇게 되면 칼은 펜보다 강해지고 야만적인 힘과 거친 광기가 교차하면서 문명은 혼미 상태에빠져 쇠퇴하고 만다.



p528


풍요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고 짐승처럼 만드는 빈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악은 정의를 부정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베풀어 준 기회를 개인이 독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근본적인 정의의 법칙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큰 안목으로 보면 정의는 우주의 최고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의를 일소하고 모든 사람ㅇ게 자연의 기회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면 우리는 정의의 법칙에 순응하게 된다. 그에 따라 부와 권력의 분배에 있어 자연에 반하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큰 원인을 제거하게 된다. 빈곤을 추방하게 된다. 탐욕이라는 무자비한 욕망을 길들이게 된다. 죄악과 비참의 근원을 고갈시킨다. 어둠 속에 지식의 등불을 비춘다. 발명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발견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정치적인 취약점을 보강하게 된다. 전제정치와 무정부주의를 방지하게 된다.


내가 제시한 개혁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인 모든 이상과 합치된다. 이것은 다른 모든 개력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개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미국 독립선언에 나타난 진리를 표현과 정신 양면에서 충실하게 구현한다. 독립선언의 심장이자 영혼인 그 “자명한” 진리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간은 남에게 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창조주로부터 받는다. 이 권리에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가가 포함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면 이들 권리도 부정된다. 토지는 사람이 생활하는 터전이자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하사물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는것만으로는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토지에 대한 평등권이 부정되는 사회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인구가 증가하고 발명이 계속되면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자유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이 진리를 무시해 욌다. 그리하여 거지가 생겨 거리를 배회한다. 빈곤은 우리가 정치적 주권자라고 떠받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결핍에서 생기는 무지는 학교에서 고칠 수 없다. 국민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투표를 한다. 정치가의 역할을 선동꾼이 차지한다. 정의의 저울에 달린 추의 무게는 돈으로 결정된다. 시민적인 덕목을 중시하지 않는 자가, 심징 위선으로라도 그 덕목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공화국의 기둥은 무거운 하중을 견디지 못해 이미 굽어있다.



p532


현재 우리 사회의 기본 제도는 정의를 부정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생존하고 생활하는 터전인 토지의 사유를 허용함으로써 사람들이 토지소유자에게 얽매이도록 하였으며 그 정도는 물질적 진보가 계속됨에 따라 더 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교묘한 연금술과도 같아서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법으로 모든 문명국가의 대중에게서 힘들여 노동한 결과를 빼앗는다. 또 고되고 희망 없는 노예생활을 제도화하며 정치적 자유 속에서 전제정치를 초래한다.


이러한 사회제도로 인해 물질적 진보라는 축복은 저주로 변한다. 이러한 사회제도로 인해 누추한 지하실과 더러운 셋집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감옥과 창녀촌은 붐비고, 남자는 궁핍에 시달리고 탐욕으로 지치며, 여자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즐거움과 순수함을 읽게 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 문명을 오래 갈 수 없다. 영원한 우주의 법칙이 이를 금한다. 이는 멸망한 제국의 폐허가 증명하고 과거의 모든 사람이 증언하는 사실이다. ‘자비’보다 더 위대하고 ‘자선’보다 더 존엄한 ‘정의’는 이 잘못을 시정하라고 명령한다.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정의는 부정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우리가 예배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정의가 내려치는 칼날을 빗겨갈 수 있을까? 굶주린 어린이가 신음하고 지친 어머니가 울고 있는데, 교회를 세운다고 해서 저 불변의 법칙의 명령을 피할 수 있을까?


(…)


지금 서구뭉명의 중심에는 궁핍과 고통이 존재하며 눈을 감는자, 신경이 무딘 자가 아니라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는 창조주를 향해 이를 해결해 내라고 부탁할 것인가? 설령 창조주가 이러한 기도를 듣고 우주를 창조했던 그 명령을 내려 태영에 더 큰 힘이 생기고 공기에도 새로운 능력이 생기고 땅에도 신선한 활력이 넘쳐서 현재 자라고 있는 곡물이 두 배로 증가하고 씨앗도 현재의 두 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과연 빈곤이 줄고 궁핍이 해결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로 인해 생기는 이익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물질세계에 흘러 들어가는 새로운 힘은 토지를 통해서만 이용할 수 있다.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되어 있는 한, 현재 창조주의 하사물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이 새로운 하사물을 독점하게 된다. 지대는 상승하지만 임금은 역시 기아선상으로 내려가고 말 것이다!



p543


정치경제학은 음울한 학문이라고 지칭되어 왔으며 현재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경제학을 폄하하여 구속하고, 진리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 주지 않고, 그 조화를 무시하고, 분명하게 지적해야 사실을 얼버무리고, 악에 대해 항의하는 대신 부정의를 옹호한 데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내가 노력하였듯이 정치경제학에 자유를 주어 그 본래의 자태를 되찾게 해 준다면 정치경제학은 희망으로 빛날 것이다.


왜냐하면 부의 생산과 분배를 지배하는 법칙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현재와 같은 사회의 궁핍과 부정의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법칙은 빈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인간 본성의 훌륭한 자질과 높은 힘이 완전하게 발달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이 우연한 섭리나 냉혹한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불변의 자비로운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알 때, 인간의 의지력이 발전의 중요한 요소이며 인간은 스스로의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경제법칙과 도덕법칙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지적 능력에 의해 각고 끝에 찾아 내는 진리가 도덕적 감각에 의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진리와 가르지 않음을 알 때, 개인의 삶의 문제에 빛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지구 상에는 우리와 다름 없는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도 살았고 현재에도 살고 있다. 기쁨과 슬픔, 수고와 노력, 희망과 두려움, 물리적 감각을 초월한 싶은 인식, 온갖 다양한 교리의 기초를 이루는 공통의 감정을 갖춘 모든 사람의 작은 삶이 무의미한 낭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진라와 정의가 억압되는 수도 많지만 우리가 전부를 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부를 볼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우리는 무도 알지 못한다. 빛과 색을 감각하게 해주는 파동은 어떤 범위를 넘으면 인간이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이 소리를 뜨는 것 역시 어떤 범위 내에 한한다. 동물 중에는 우리보다 감각이 뛰어난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자리의 현상을 다 안다고? 태양계에 비교하면 지구는 잘 보이지 않는 점에 불과하다. 태양계도 우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시각을 스치는 현상이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망각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법칙은 우리의 시계를 너머 저 멀리까지 지배한다.




진보와 빈곤 - 10점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비봉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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