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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의 본질에 관하여
    2018. 9. 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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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중력파를 인류가 관측해내는데 성공하면서,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전히 증명해 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충돌했다는 두 블랙홀의 정확한 질량과 거리, 반지름, 스핀, 쌍성궤도반지름 등의 정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며, 그 파형과 진폭등의 정보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양한 파라미터들을 대입하여 얻은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결과물과 측정된 파형을 비교함으로써 가장 유사한 파형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측한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참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관측된 결과를 아인슈타인인 방정식이 도출해내는 결론에 맞게 끼워 맞춘 것은 아닌가?

     

    인류가 만든 이론 중에 가장 정밀한 이론이라고 알려진 양자장이론으로부터, 우리는 힉스입자를 예측하고 발견하는데 성공하였고, 천체물리학으로부터 우주배경복사의 존재를 증명해 냈으며, 블랙홀의 존재 역시 입증해 냈다. 그렇기 때문에 중력파의 관측 역시 상대성이론을 증명 해 냈다 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과학에서 말하는 ‘증명’은 ‘분석적’ 증명이라기 보다는 ‘종합적’ 증명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수학은 증명 과정에서 나타난 사소한 실수가 곧바로 파산으로 이어질 만큼 그 과정에서의 엄밀한 논증을 요구하지만, 사회학과 철학은 이상한 실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도 완전히 붕괴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수학은 분석적이고 철학과 사회학은 종합적이다. 여기서 과학은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여 완전히 분석적이지도 완전히 종합적이지도 않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가끔은 진리로 의도된 이론의 증명을 위해 종합적 열망을 지속하기도 하기도, 어떠한 관측도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에 분석적 열망을 포기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이 종교적 믿음과 다른 점은, 과학 이론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제나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과학은 보다 나은 진리를 향해 조금씩 전진해 나갈 수 있다.

     

    이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서 질문 해보자. 그렇다면 중력파 물리학이 행한 증명은 어떠한 증명인가?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은 우문이다. 엄밀한 수학적 토대 위에 통계학적 분석으로 진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작업은 순수하게 분석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바라본다면, 과학이라는 활동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과학 외적인 부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종합적 과정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해리 콜린스가 중력파 관측 과정에 참여하여 책을 펴 냈다고 하였을 때, 그 속에서 있었던 과학자들의 실패와 좌절, 실망과 희망 그리고 성공의 우여곡절 이외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사회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중력파 관측이라는 거대과학의 모습과 그 속의 전문가 사회의 모습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그만의 시각을 기대하였고, 이 책은 그러한 나의 기대을 충족시켜 주었다. 어느때 보다 사회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 오늘날의 대형 과학 프로젝트들의 모습을, 제2의 물결의 기초 위에서 빠짐없이 세겨 놓았다. 과도한 전문가 주의와, 전문성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과학이 증명되고 구성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중력파 관측을 위한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으며 동시에 그만의 관점을 잃지 않는다. 중력파의 관측과 노벨상 수상으로 중력파 천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동하고 여기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거 가는 지금, 이 책이 출간과 함께 한국어로 번역될 것을 기대 하였지만 아직까지 번역의 소식은 없는것 같다. 훌륭한 번역가를 만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를 기대하며, 13장의 마지막 소단원을 짧게 발번역하여 실어본다.

     

     

     

    결론과 반복 :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물리학을 원하는가? [p310]

     

    이것은 물리학이 가진 힘과 아름다움을 맞이할 순간을 염원하며, 가장 큰 규모의 과학적 탐험을 행한 이들과  동행한, 한 사람의 여행담이다. 내가 중력파 물리학을 사랑한지 4년 반이 지난 지금 가장 놀란 것은, 이것에 대한 약간의 환상이 깨어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이것은 사회학자로서의 내가 완전히 나눌 수없는 승리에 대한 질투 이상의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CWI 과학 모델과 같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에 종사하는 커뮤니티의 사람들을 수십년에 걸쳐 즐겁게 지켜보아 왔는데, 이제는 승리에 도취된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는 나머지 커뮤니티들을 경시 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토피아를 위한 모델을 만들지 못한다.

     

    권위를 표출하고 마술 트릭에 놀랐으면 하는 내적인 욕망이나, 다른 의견을 애써 무시하려는 철저한 전문가주의, 그리고 5-시그마 이상의 결과라는 물리학 비즈니스 때문에 “제로 지연 초과”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꺼리는 것 등이 바로 내가 승리주의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이다. 나는 과학자들이 최전선에서 과학적 연구가 내재한 성질들을 유지하며 이러한 순간들을 폭로해주기를 바란다. 그 대상들은 실재하며 종교대체나 경제지원 등을 표방하지 않음으로써 물리학자 스스로를 정당화 시키는 방법 중 하나이다. 대형강입자가속기 LHC에 쓰인 수십억 달러가 힉스 입자에 의해 정당화 되었으며, 중력파 탐지에 들어간 10억달러의 돈은 중력파의 관측으로부터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중력파의 관측은 과학자들의 삶과 나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기에 이 사례를 나에게 대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독자 여러분 스스로에게 힉스입자의 발견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지 잘문 해보라.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물리학을 원하는가? 과학사를 보면 과학이라는 왕관에서는 오직 몇개의 보석 만이 밝게 빛났고, 이제 여기에 또다른 빛나는 보석 하나를 물리학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밝게 빛나는 보석에서 일어난 일들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물리학을 민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러한 상황들은 과학에서 흔하지 않으며, 물리학에서도 전형적인 것이 아니다. 50년간의 고귀한 논쟁과 인내를 감내한 물리학자들의 견해는 보석일지도 모르지만, 보석은 노동과 노력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이것은 왕관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지만 반짝이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확신 대 정의에서 시작한 중력파 물리학에 대한 나의 서술을 훑어보는 것으로 요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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