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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이라는 기계, 기계라는 인간 ; 이노센스
    문화 2012. 8. 1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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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게되었다. 이 영화가 개봉되던 해인 2004년, 흔해빠진 ‘재밌있다’, ‘재미없다’라는 단편적 감상도 아닌 그리고 영화 내의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대한 것도 아닌 단지 ‘충격’이라는 한 단어만이 머리속에 남아있었던 이 영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머리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은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이다.


    우리가 믿는 신과 희망이 과학 현상일 뿐이라면, 우리의 사랑 또한 과학 현상이라 해야할 것이다.

    -빌리에 드 릴아당  『미래의 이브』 중


    영화의 시작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초반부에 『시뮬라크와 시뮬라시옹』의 책 제목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내용을 암시해주는 것과 같이, 빌리에 드 릴아당의 소설, 『미래의 이브』 이 한 구절을 보여주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해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과 기계, 육체와 정신, 현실과 가상 사이의 경계는 무엇이며, 이것들을 경계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영화 『이노센스』는 전뇌화와 의체화 기술의 발달로 사이보그화된 인간의 모습 속에서 바로 이 점에 대한 물음 던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야.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것 인간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럼 인간의 전단계로서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대체 뭘까? 명백히 내면은 인간과 다르지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여자애가 소꿉놀이 때 쓰는 인형은 실제 아기의 대체물이 아니야. 여자애는 육아 연습을 하는게 아니라 어쩌면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어. 즉, 육아는 인조 인간을 만들려는 오랜 꿈을 가장 손쉽게 실현시켜 주는 방법이었다는 거지'

    - 이노센스 중



    무엇이 인간인가? 


    데카르트는 우리가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명석하게 인식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참이라고 간주해선 안된다고 하였다. 즉,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복잡한 문제를 가능한 한 낱낱의 부분으로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해 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역시 확실하다. 이것으로 자신이 완전한 존재에 대한 명석한 관념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나, 그는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불완전한 존재에서 유래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즉,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자아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완전한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두 가지의 실체가 존재하다는 생각을 펼쳐나갔다. 하나는 의지를 가진 영혼이며 다른 하나는 육체 혹은 물질이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참이라고 밝혀진 법칙들이 물질의 운동을 완전히 결정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법칙적 사고는 동물과 인간의 몸 역시 예외로 삼을 이유도 전혀 없었다. 데카르트의 기계주의 철학은 동물을 일종의 복잡한 자동 기계로 간주하였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의지가 육체적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의 진보는 의지와 육체의 이원론에 대한 절충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은 마음이 물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견해를 포기했다. 그들은 역으로 물질은 마음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신과 육체가 각각 자체의 법칙에 따르며 평행하게 연속된다는 심신평행론에 이른다. 즉, 나 자신이 손을 올리고자 생각한다면, 나의 이성을 통해 인식한 것과 동일한 현실을 선한 신께서 손을 올리는 행위를 구현해 준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가 엄격하게 대응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만약 이 대응의 법칙과 물리학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 지식과 기술이 충분하다면 신체적 현상 뿐만 아니라 정신적 현상의 발생까지도 예측할 수 있게된다. 어떤 경우도 정신적 자유의지는 신체적 표현이 수반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세기에 이르러 데카르트의 이론은 인간 역시 전적으로 물리학 법칙에 의해 통제된다고 생각되는 순수 유물론으로 대체되었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인간의 구성 중에서 원자들의 불변성을 제외하면 불변하는 것은 없다.


    여기서 남은 것은 작은 자유 의지이다. 인간에겐 불멸하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계적 작용에 의해 움직이지만, 손을 올릴 것인지, 올리지 말 것인지, 손을 올리라는 명령을 듣고 손을 올릴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인간 개인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의지에 원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도덕율이 승인하는 선한일을 할 수 있고, 도덕율이 승인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할 수도 있다. 의지와 욕망의 원인은 내분비선의 작용을 받기도 하며, 어린시절의 교육, 경험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도덕률에 근거할 수 있다. 어떤 의지와 욕망의 원인을 형성하는 근원은 각기 다른 기억과 경험, 도덕률, 내분비선의 작용에 의존한다.


    이제 다시 17세기의 데카르트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함으로 따라서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현실적 대상을 인식하고 동시에 의식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의식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한 가지는 일정한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한다는 뜻이며, 다른 한 가지는 우리의 사고와 감정 안에 무생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환경에 대한 반응에서 소리에 반응하여 뒤 돌아본다면 그것은 소리라는 외부세계에 지각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각으로부터 그것을 의식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나무 막대기나 돌에 대한 자극의 반응 역시 동물이나 인간과 같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물리적 반응을 보임을 역시 알 수 있다. 바꿔 이야기하면 인간과 돌 사이의 지각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임을 말한다.


    의식에서 중요한 부분인 위의 첫 번째 의미보다는 두 번째 의미에 중점을 두는 것이 옳다. 우리는 외부적 대상들에 대해 반응할 뿐 아니라 우리가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돌 자신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돌 역시 이를 알고 있다면 돌 역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이라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각하고 안다는 것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꿔 이야기하면 즉각적으로 무엇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즉각적인 기억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추억을 기억과 구별할 방법은 없어. 그게 뭐건 간에 그걸 제대로 이해하는 건 아주 오랜 후에야 가능하지. 시간은 저장이 안되서 골치아픈거야.

    집에 있는 아내와 딸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실은 혼자살고 있는데 가족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일 수도 있어.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의 나가 내일의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의 내가 했던 사유와 판단이 내일의 판단과 다르다면 나라는 주체는 더 이상 동일한 주체로써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억이 모두 동일하다면 즉, 사유와 판단의 가치와 기준이 모두 동일하다면 비로소 동일한 하나의 주체로써 동질성을 부여할 수 있다. 내가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기억의 동질성에 의존한다.



    백은 흑이 아니다


    '정말 기분 더럽지? 겉으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살아있는게 맞는가 하는 의혹. 반대로, 생명이 없는 사물이 살아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혹. 인형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형이 인간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인간 자신과 다름없기 때문이야. 인간이 간단한 장치와 물질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 즉, 인간이라는 현상은 실은 허상이 아닌가 하는 공포.

    생명의 현상을 밝히려 했던 과학도 이런 공포심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 자연을 예측할 수 있을거라는 신념은 인간역시 단순한 기계부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지. '


    ①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하거나, 태만하여 인간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 
    ②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단, 인간의 명령이 제1조에 해당될 경우는 제외한다 
    ③로봇은 스스로를 지켜야만 한다. 단, 제1조와 제2조에 해당할 경우는 제외한다.

    -아이작 아시모프, 로봇윤리강령


    인간화 된 기계와 기계환 된 인간, 육체적 상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인간과 기계의 모습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기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지 ‘백은 흑이 아니다’라는 구별처럼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식의 단순한 인식에 불과할 뿐이다.


    의지와 의식이 기억과 경험, 교육, 도덕률에 의존한다면, 로봇윤리강령에 의한 도덕률로써, 미리 입력된 기억과 지식은 인간과 돌의 의식이 단지 정도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논의에서 머무르게 된다. 특히, 자유의지를 획득하는 단계의 카오스 상태에 있는 아이들과 기계의 구분은 보다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새의 울음에 눈물 흘려도, 물고기의 피에는 울지 않네


    그럼에도 인간은 기계와 동일하지 않음을 부르짓는다. 

    인간이 간단한 장치와 물질로 환원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감. 마치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척하여, 과학은 절대 인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나, 화학이나 물리학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적용시켜야만 인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은 낭만주의적 반동처럼 말이다.

    여전히 이 영화가 던져준 질문은 맴돈다. 무엇인 인간이며, 무엇이 기계인지. 이것들의 경계는 무엇인지.



    Bertrand Russell, Religion and Science, dongnyok, 2011, 98-148
    Bertrand Russell,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eulyoo, 1996, 719-732, 858-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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