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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문화를 다시 읽으며
    2013. 10. 2.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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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이 사회적 과정이라는 관찰에서 과학이론에 작용한 사회적, 역사적 제반힘 때문에 과학이 사회적이라는 주장으로 나가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등산가들은 정상에 오르는 다양한 경로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 있고, 이러한 다양한 경로는 당시 탐험의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조건 지워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좋은 경로를 발견하던가 발견에 실패하던가 둘 중에 하나일 것이고, 이는 정산에 올라가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학이 등산과 같다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과학자로서의 내 경험은 과학이 등산과 같다고 확신하게끔 만든다. (스티븐 와이버그, 최종이론의 꿈, p149)


    스티븐 와인버그가 그의 저서인 최종이론의 꿈에서 과학에 대한 제반 철학적 입장과 스트롱프로그램을 비판하는 견해를 내 비췄다. 그는 이 저서에서 20세기 과학철학이 과학자에게 미친 영향이 거의 전무하다고 하면서, 과학에서 철학 무용론을 강조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는 근대철학 특히, 실증주의 철학은 과학의 연구 대상이 눈에 보이고 측정할 수 있는 대상에 국한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과학의 발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측정도 어려운 대상을 상정하고 이의 존재를 입증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20세기 과학철학은 과학의 불충분결정론이나 쿤의 페러다임에서 보듯, 과학자의 이론에 무언가 불충분하고 모자란 것이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와인버그는 이런 주장들이 실제로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다. [1]


    눈여겨 볼 부분은, 와인버그가 최종이론의 꿈에서 ‘철학에 반하여’ 라는 제목의 소단원을 할애 하면서까지 비판한 근대 철학의 무용성과 과학에 대한 제반철학자들의 몰이해를 지적한 부분이 결코 감성적 주장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근대 철학이 과학을 설명하고 규정지으려 하는 것은 철학의 목적, 어쩌면 과도하게 발전되어 인간이라는 요소가 분리되어가는 근대 과학에 인문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기본 목적인 인간에 대한 설명으로의 환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과학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과학 역시 철학의 무용성과 비판의 근거를 철학의 높이에서 견주어 비판하고 있다.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적 인물로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몰이해, 때로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C.P. 스노우, 두 문화, p15)


    서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오해와 편견을 가중시키게 된다. 때문에 싸움도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은 서로의 높이에서, 혹은 서로가 높이를 맞추려 노력하는 것으로 훌륭하게 소퉁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노우의 두 문화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때문에 대단히 냉소적이었다. 


    그는 과학자이면서 문학 작가로 활동하며 동료 작가들을 많이 만나며 많은 대화를 나눈것으로 보인다. 그때 그들이 영문학의 대작을 읽은 적이 없다는 과학자들에 대한 뉴스를 듣고 동정어린 쓴 웃음을 지으며, 과학자를 무지한 전문가라며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은 듣고 참을 수 없었던 스노우는 그 자리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반응은 냉담했고 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스노우는 현대 물리학의 체계는 진보한다는데, 서구의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 중의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석이 시대의 선조와 같은 통찰력 밖에는 없는 실정이라며 개탄한다.


    스노우가 두 문화라고 명명한 근거는 이런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셰익스피어도 읽기 않았다고 무시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열역학 제2법칙을 알 필요도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며 또 당연한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두 문화의 이 같은 내용과 논지는 나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한 쪽 극에는 이해의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몰이해의 지식인이라는 두 문화가 존재한다’


    냉전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불러온 기술의 발전과 혁명은 과학에 대한 자만과 오만을 자리잡게 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는 고전적 담론을 무시한체 과학적 성과가 경제적 이득과 국익에 기여할 것이란 믿을을 가지고 이를 전파했으며, 인문학자들은 반대로 고전적 담론에 묶여 근대 과학혁명으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 과학을 비판한다. 학문의 전문화와 거대화는 담론의 소비와 결정을 전문가들의 언어로 점철되었으며 과학과 시민을 분리시키며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오늘날의 과학의 기여와 그것으로부터 얻음 힘, 여기에 소칼의 날조 논문 사건은 일부 어쩌면 다수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과학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등장했는지도 모른다. 이같은 상황은 넬킨의 지적에서처럼, ‘특허나 연구비 따내기 위한 경쟁 속에서 과학사기나 증거변조 등의 부정행위의 증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Nelkin,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1996, pA52] 는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스노우의 두 문화를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때의 실소와 냉소에서 어떤 안타까움으로 변화되었음을 느꼈다.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는 실존하고 있다. 다만 빈익빈 부익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강단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인문학에 의한 과학의 재단과 몰이해로부터 오는 담론에 대항하고자 그들의 언어로 인문학을 비판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이 내 놓은 통섭이 인문학을 재단하고 공격하려는데 대해 강단의 인문학자들은 과학을 공부하고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과학의 언어를 배우고 또 그것으로부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의 실험실에서의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에게는 이런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실험실의 생활은 이러한 여유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제한적이고 왜곡된 정보의 소비로 이어지고 이것이 결국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의 전재, 양자사이의 몰이해로부터오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빈과 부의 두 문화. 다시 만난 두 문화는 이런 씁쓸함을 남겨주었다.


    두 문화 - 6점
    C.P.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사이언스북스


    [1] 홍성욱,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9권 제2호, 160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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