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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
    과학 2012. 9. 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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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정신과 역사, 문화를 지배하던 종교는 16세기, 그리스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다가 갑자기 등장한 과학에 의해 그 자리를 점차 빼앗기게 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과학은 관찰과 그것에 기반을 둔 추론을 통해 세계에 관한 특정한 사실을,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주고 때로는 미래의 현상들을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법칙들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은 우리를 혼란스러운 지식들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잘 정리된 지식 체계로 이끌어 주었다. 

    과학은 또한 ‘무엇을 발견해 내는 특별한 방법’ 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측면과 더불어, 어떤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으로부터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나, 그 새로운 것들을 현실에서 구현해 내는 기술적 측면 역시 포함하고 있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조차도 과학에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의 진보가 이끌어낸 기술의 진보라는 결과물은, 과학문명이라는 또 다른 문명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의 산업혁명과 그로인한 풍족한 생활의 영위, 인류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자유 시민의 등장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 진보의 결과물이 보여준 문명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학을 자연스럽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나, 새로운 것들을 현실에서 구현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기술과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때문에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의 중요성이나 과학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위의 후자의 경우로 수렴하게 되었다.

    과학과 관련한 최근의 뉴스거리들의 절반 이상 혹은 거의 대부분은 새로운 기술 그리고 새롭게 알게된 것들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어떤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등에 대한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은 동의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던져보자. 과학의 진보로부터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내었고, 이것으로 보다 발전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 결과로써 과학은 기술 발전을 의해 기초적인 지식, 다시 말해 기술 종속적인 위치로써의 과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한가? 이것이 과학의 역할이며 과학의 전부인가? 

    이것은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질문들 중 하나이다. 과학이란 무엇이며, 과학이 중요하다고는 말하지만 대체 과학의 어떤점이 중요한지, 그리고 과학과 기술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며,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래서 이런 과학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려고 한다.


    선험적 가정에서 귀납적인 관찰로

    교육을 받은 중세 사람들은 한 가지의 통일된 논리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들 가운데 일부는 계시의 도움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도 입증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전능하고 자애로운 창조주의 존재이다. 여기서 창조주는 전능하고 자애로우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이 당신의 섭리에 대한 지식, 즉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지식도 없이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결론이 따라나온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는 틀림없이 존재하며, 이 계시는 명백히 성경과 교회의 결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모든 주장은 모든 기독교가 받아들인 선험적인 전제들에서 연역되고 있는 것이며, 일반원리에 기초해 추론한 원리들은 반드시 참이다.

    때문에 새로운 진리탐구의 방법을 실천하면서도, 진리 자체에 대해서 만큼은 그들과 대척 관계에 있었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 역학, 생물학, 논리학등을 기초로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의 헤레니즘 시기의 그리스 자연철학에 영향을 미치며, 11세기부터 12세기 성당 학교, 12세기에서 13세기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헬레니즘의 자연철학을 계승한 중세 스콜라 철학까지 이어진다. 

    때문에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성경, 기독교의 교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독창적인 사고는 물론 사실의 탐구마저도 이 가르침의 경계선을 넘어가서는 안 됐다. 목성에도 위성이 있는지,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는 속도로 낙하하는지의 여부는 관찰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나 성서의 내용을 가지고 추론하여 결정할 문제였다.

    16세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은 17세기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철학의 등장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근대 자연철학이 진화하면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이 가지고 있던 형이상학적 관점 위주의 자연현상에 대한 해석을, 수학과 또는 기하학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을 원칙적으로 수학과 또는 기하학화 할 수 있는 개념들, 가령 크기, 모양, 운동 속력 등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수식이나 기하학 도형을 사용해 정량적 공식으로 표현하고 증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근대 자연철학의 이와같은 특성은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이 힘의 개념, 그리고 미분과 적분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 정점에 도달한다.

    천문학과 역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과학혁명은,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 그리고 자연의 새 법칙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수학적 방법에 크게 의존하였다. 여기서 관찰 혹은 실험 행위는 수학적 방법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을 검증하는 것, 혹은 이미 아는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베이컨은 여기서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고안한다. 베이컨은 기존의 연금술이 보여주었던 실험의 형태와 같이 단지 몇 가지 실험만으로 결론을 이끌어 내고, 여기에 어떤 미신이나 믿음을 적용하려는데 반하여 귀납적 방법을 사용해야 함을 말한다.

    초기 베이컨의 귀납적방법은 천문학과 역학 중심의 자연철학에 거의 공헌을 하지 못한다. 이들 분야는 실험보다 수학적 방법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등장한 열역학, 전자기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의 과학분야는 역으로 실험의 역할을 중시하는 과학적방법이 새 법칙을 발견하고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과학에서 새로운 것, 새로운 아이디어나 가설이 참인지 아닌지를 증명하고 심판하는 것은 결국 관찰 결과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실험으로부터 도출된 예외가 되는 관찰 결과는 가설을 시험하며, 예외는 다시 그 규칙 혹은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규칙에 예외가 존재하고 규칙에 위반되는 예외적인 상황이 관찰된다면 그 규칙은 틀린것이다.

    어떤 규칙에 예외가 등장했다는 것은 기존에 우리가 믿고 있었던 예전의 규칙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베이컨이 귀납적 방법을 적용하고자 했던 이유, 규칙의 예외를 관찰할 실험 결과에 어떤 미신이나 믿음을 배제된다는 것을 이해하게된다. 만일 이 결과가 기존의 규칙으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예외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옳은 규칙은 찾아야 한다.


    과학의 특성

    과학은 앞선 설명에서와 같이 광범위한 가정이 아니라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발견된 특정 사실에서 출발한다. 거기서 일반 규칙이 얻어지며, 만약 그 규칙이 참이라면 문제의 사실들은 실례가 된다. 그러나 이 규칙은 사실로 단언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작업가설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이 가설이 옳다면 지금까지 관찰되지 않은 어떤 현상이 어떤 환경에서 발생할 것이다. 만일 그 현상들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가설은 버려지고 새로운 가설이 만들어져야 한다. 많은 사실들이 가설에 부합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가설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당히 개연성 있는 것으로 간주되긴 하는데 그 정도까지 되면 이제 가설이라기보다는 이론이라는 명칭으로 불기에 된다.

    만약, 제각각의 사실들에서 비롯된 수많은 이론들이 참이라면, 이론들 전부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새롭고 보다 일반적인 가설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다. 이런 일반화 과정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과학은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다. 언제나 잠정적이고 현재의 이론들이 조만간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 예상하며, 자신의 방법에 완벽하고 최종적인 설명에 도달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름을 동시에 지각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여기에 조금 더 엄밀한 정확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관찰법과 실험 방법에 의해 기존의 규칙이 무너지고 새롭운 규칙이 태어나기도 한다. 기존의 낡은 규칙은 어떤 시점까지의 진리로 남으며, 그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기술적 발명들이 그 증거로 남는다.

    과학은 이렇게 절대적 진리를 포기한다. 대신 발명을 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데 성공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규칙의 발견 혹은 미래를 바꾸기 위한 규칙. 이른바 기술적인 진리로 대체할 것을 요구받는다.

    과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과학의 현실적 응용 즉, 과학의 결과물을 이용해 어떤 것을 만들거나 새로운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이 능력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19세기 산업혁명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에서 그 영향력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과학은 두 가지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과학으로써의 과학. 다른 하나는 기술로써의 과학이다. 이 둘은 무엇이 다른가?


    과학과 기술

    과학적 특성은 신중하고 잠정적이며 점진적이다. 자기가 모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가 획득한 최고의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머지않아 수정될 수 있으며, 이 수정 과정에도 연구와 토론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 기술은 과학의 영역 밖에서 발전해왔다. 때문에 과학의 이러한 특성을 완전히 공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발전소, 방송, 로켓, 자동차, 휴대폰, 컴퓨터 등은 물리학에 기초한 발명품이다. 그러나 이 발명품들이 기초하고 있는 과학은 뉴턱역학이나 맥스웰의 전자기학, 실험적으로 검증된 양자역학 이론과 고체물리학 이론, 특수상대성이론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 발명품들이 기초하고 있는 이론이 아직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가령 발전소가 작동하는데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작동이 중지되지는 않으며, 양자역학의 체계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휴대폰의 작동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전의 이론에 기초한 제품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새로운 등장 때문에 제품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성취된 과학적 성과는 기술적으로 응용될 수 있으며, 기술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과학적 성과는 기술적용 가능한 범위에서 완전하다. 때문에 기술은 과학처럼 신중하고 잠정적이며 점진적인 특성을 가질 필요가 적어지거나 혹은 그럴 필요가 없다. 때문에 기술적으로 응용 가능한 과학의 획득은 전적으로 참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동일화다. 더 정확히는 국가와 대기업 그리고 자본이 바라보는 과학에 대한 시각이다. 과학은 보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과학과 상대적으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기술의 특성으로 과학을 바라보게 된다. 때문에 과학은 신중하고, 잠정적이며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을 위한, 보다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한,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며, 과학을 오만과 확신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

    “물질을 이루는 원자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전기력과 연관돼 있어서 아주 놀라운 특징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원자들 간의 상호 화학적 친화력입니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어린이들을 위해 했던 6개의 크리스마스 강연 중 하나인 ‘양초의 화학적 역사’에서 양초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연소나 화학의 주제들에 설명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가 쓴 책의 서문에 페러데이의 생애와 그의 과학적 발견에 대해 묘사해 놓은 대목에서, 페러데이가 화학물질이 전기분해될 때 필요한 전기의 양이 분리된 원자들의 총 개수를 원자가로 나눈 값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쓰고, 그러면서 그가 발견한 화학적 원리들은 현재 크롬 도금이나 알루미늄의 음극도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산업에 응용되고 있다는 언급을 썼다고 한다.

    파인만은 페러데이를 묘사한 그 책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는 어떤 원자들은 전기적으로 양성을 띠고 다른 원자들은 전기적으로 음성을 띠며 그 크기가 원자들마다 달라 서로 일정한 비율로 끌러당기기 때문에, 철과 산소가 만나면 특별한 조합 비율을 가진 산화철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전기학과 화학이라는 두 거대한 분야가 하나오 통일되는 과학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들 중 하나이다. 패러데이는 전기력의 결과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이것이 크롬 도금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인만의 이러한 비판은 아주 명쾌하다. 과학은 훈련과 힘든 연구를 통해 얻은 보상이다. 과학자는 무엇인가에 적용하기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을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과학기사의 끄트머리에 이 연구의 성과로 어딘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문장과 같은 것을 위해 과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발견한 과학자는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발전이 그러했듯 우리는 무엇인가의 목적이나 목표를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꿔 이야기 하면, 기술적 가치로써 과학을 대하는 행위는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과학 그 자체를 위해 과학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길 원한다.


    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승산, 2005, 12-13
    Ibid, 18
    Ibid, 25-26
    버트란드 러셀, 종교와 과학, 동녘, 2011, 9-10
    Ibid, 74-96
    Ibid, 219
    버트란드 러셀, 서양철학사, 을류문화사, 2009, 677-697
    앨런 차이머, 과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1999, 19-90
    김성환, 17세기 자연철학, 그린비, 200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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