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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과학의 자생 과정과 한국 과학의 현재
    과학 2012. 2. 27.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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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과학의 자생과정

    일본이 물리학을 포함한 서양 과학의 체계적 도입의 시작은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만, 일본은 이미 16세기 중반부터 서양과학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 전도사나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서양과학을 접하고 있었으며, 1639년의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쇄국정책 실시 이후에도 일부 유학자 층에 의해 제한적이나마 서양의 천문학, 의학, 식물학, 항해술, 물리학 등을 접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본은 1855년 페리 제독이 몰고 온 군함에 의한 개국을 강요받을 때, 이들 일부층에 의해 형성된 서양의 지식, 그리고 서양의 언어도 된 책을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의 유지로 서양 과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1]

    일본이 서양과학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거부감 없이 습득할 수 있게 된 것은, 동양 철학의 기본적인 유교문명사상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의 목적은 자연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실체를 파악하는데 있는데, 이러한 과학적 기조는 동양의 학자들에 의해 수천년간 연구되어 온 자연에 또는 물질에 대한 리理에 대한 연구와도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머리로 하는 지적활동이 손을 사용하는 활동보다도 더 높이 평가해 왔다.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가 정치를 안정시킨 다음에 유교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무술을 연마와 더불어 사무라이 층의 중요한 교육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에 종사한 층이 대다수가 사무라이 층에서 나왔다는 점은 이러한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버트런드 러셀이 1919년 중국에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강연한 내용을 모아 쓴 ‘The Problem of China’라는 책에서도, 러셀은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희랍은 이집트에게 배웠고, 로마는 희랍에게 배웠고, 아랍은 로마제국에게 배웠고, 중세유럽은 아랍에서 배웠고, 르네상스 유럽은 비잔틴에게 배웠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선생보다 학생이 더 낫다. 지금 중국이 서구에게서 배우는 학생노릇을 하고 있다면 인류문명의 대세로 볼 때, 분명 중국이라는 학생은 서구라는 선생보다 더 나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주나라로부터 3000녀 년 동안 끊임없이 주변문영으로부터 창조적인 요소들을 금기없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개방적으로 흡수하여 왔다. 우선 중국문명은 부정적인 종교족, 신화적 억압이 없으며, 전통 내에서 서구과학을 배타할 아무런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유교문명은 서구과학을 흡수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과학은 보편적이며 가치중립적이며 양적인 것이라서 문명간의 전이가 가장 정확하고 쉬운 것이다. 중국인이나 여타 수도작 동방문명의 사람들은 수리에 밝으며 양적인 진리를 흡수하는 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왔다.[3]

    동양의 유교적 사상은 근대의 중국과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서양의 지식을 흡수하는데 높은 효용성을 제공하였다. 또한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적 지식은 지적활동으로 자연과 물질에 대한 리理의 이해가, 고대 중국 고전 혹은 고대 중국의 성현의 말씀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와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이 물리학을 1868년부터 체계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하였을 때 그것은 자연과 물질에 대한 리理의 지적 탐구가 아닌, 물질적인 것, 측정할 수 있는 것, 또는 기구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도쿄 대학교 의학부에서 25년간 강의했던 폰 벨츠는 다음과 같이 당시 서양 과학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를 평한다. [4]

    일본인들은 과학을 마치 하나의 기계와 같이 여겨서 일정한 때에 주어진 일정한 일을 할 수 있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옮겨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중대한 착각이다. 서구의 과학 체계는 결코 기계가 아니며, 오히려 특정한 기후와 토양이 필요한 하나의 생명체라 할 수 있다.

    (중략)

    서구의 국가들은 일본인 당신들에게 많은 선생들은 보내 서구의 과학 사상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흔히 왜곡되어왔다. 서구에서 온 선생들은 과학이라는 나무를 일본이라는 토양에 심고자 했던데 반해서 일본인들은 이들을 그 나무의 열매를 팔기 위해서 온 장사꾼으로 보았던 것이다.[5]

    따라서 물리학도 엔지니어나 화학자들의 교육을 위한 유용한 도구, 또는 일본인들에게 시급했던 지진학, 야금학, 전자기학에 으용하기 위한 분야로 파악했다. 물리학을 이렇게 실용적인 학문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대부분의 일본 물리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6]

    이러한 현상이, 앞선 표현과 같이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된 근본적 원인은 근대화에 있다. 근대화라는 국가적 요구는 동양의 전통적 가치와 사상이 과학자들 혹은 사회 전체에 뿌리내리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오히려,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것은 낡고, 버려야 하며, 빨리 교체해야하는, 마땅히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 ‘서양적인 것’을 모방하는 것이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본이 다시 ‘서양적인 것’을 쫒기만 하는 것이 아닌, 다시 ‘일본적인 것’을 찾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그리고 근대화의 요구와 목적으로써 기능하는 과학이 아닌 학문으로써의 과학으로 전환되어, 열매가 아닌 나무가 자랄 수 있게 된 전환점을 제공해 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매우 컸다. 

    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승전국의 일원이 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서구의 산업 국가들이 일본에의 기술 이전을 꺼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국가들로부터 수입하던 각종 재료들이 전쟁으로부터 공급이 중단되자 일본 산업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보충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러한 일본의 국가적 위기로 일본 정부와 산업계는 앞다투어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급속히 팽창한 일본의 과학 연구소는 그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대부분 기술 중심의 과학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근대화가 양적으로 충분히 팽창되어 있었으며, 근대화나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은 이미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술 중심의 과학에서 기술의 목적이 아닌 순수 과학 중심의 활동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7]

    또한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괄목할 만한 경제적, 정치적 성장장 그리고 유카와의 중간자론 등 일본 물리학자의 활약 등에서 일본은 더 이상 서구를 쫒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닌, 앞서갈 수 있는, 그리고 그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시대의 조류로 등장했으며, 1949년의 유카와의 노벨상, 그리고 1965년의 도모나가가 슈윙거와 파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소식등은 일본인들의 자존심 갖게 만들며 동시에 과학의 나무와 토양을 정착시키는데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한국 과학의 현재

    일본이 과학을 자생 가능한 토양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을 몇 단계를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1. 서양 과학의 유입
    2. 근대화, 산업화의 요구에 따른 기술 중심의 과학 성장
    3. 근대화, 산업화의 팽창에 필요한 기술과학, 인력의 성숙 및 사회적 기반의 성숙
    4. 서양의 과학이 아닌 자국의 문화적, 사회적 기반에 따른 과학으로의 자생

    일본의 사례가 보여준 위의 과정은 비단 일본에 한정되 예는 아니다. 보편적 틀에서 서양의 과학을 수입한 미국, 중국, 한국 등의 국가 전반에 포함되는 일련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 어디에 해당되고 있는가?

    한국의 과학적 성장과 과학의 이해는 현재 ‘박정희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진일보 하고 있지 못하다. 한국의 과학은 철저히 나무가 아닌 열매로써의 과학을 중시하고 있으며, 기술과학 중심의 태도에 머물러 있다. 또한 과학의 ‘박정희의 페러다임’은 과학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도구적 사용으로 전락시켰으며, 머리만으로 자연과 물질을 탐구하는 지적활동은 몸을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것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돈이 되지 않는 비생산적이며 비효율적인 활동으로 전락시켰다.

    기술과학 조차 자생이 아닌, 서구의 모방을 토대로 성장해 나갔다. 동양의 전통 및 사상은 낡은 것으로, 버려야 하는 것으로, 빨리 서구적인 것으로 교체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미국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의 종속을 선진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써 여기고 있다.

    만일 한국 과학의 현재 위치를 위의 단계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두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본격적으로 습득하여 과학을 열매만을 따 먹는 것이 아닌, 과학이라는 나무를 기르고 그 토양을 다지는 것으로, 최근 꾸준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게 된데까지 대략 100년이 소요되었다. 일본 역시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 현재 한국과 같은 기술과학 중심의 페러다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 사회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폐쇄적 시스템과, 학벌, 학연주의 역시 일본 사회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 현재 한국이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열매가 아닌 나무를 향해

    일본은 양차대전으로 유럽으로의 유학생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유학 비율의 축소에 따른 국내 학생의 증가가 일본 과학의 자생적 토양 생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러셀의 말처럼 서구라는 스승을 배워오는 학생의 입장으로 선생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선생을 배워 오는 것이 더 유용할 수 있다.

    일본이 과학에 있어서 자생적 나무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계기는 일본의 문화적, 사회적 성숙 즉, 학벌과 지역주의의 해체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20세기 초 일본의 과학계는 실용화 가능한 응용과학으로써의 실험과학, 기술과학 위주의 과학으로, 일본 내에서의 과학적 영향력은 도쿄, 도후쿠, 교토 대학이 양분하고 있던 상태였다. 때문에 일본에서 과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이들의 제도권 대학의 도움을 받고, 교수에게 인정받거나 그들의 후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일본의 대학 제도는 유럽의 석좌 제도와 미국의 과 제도를 융합하여, 한 과에 몇 안되는 석좌 교수에게 절대권력을 주었다. 이들은 봉건 영주와 같은 위치로써 젊은 조교수들을 이용해 자신의 연구에 이용하기도 했다. 이 같은 봉건적 또는 분파주의적 상황 속에서, 졸업 후의 정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학생들은 교수가 지정하거나 추진한 실험 과제를 묵묵히 수행할 수 밖에 없는 매우 좁은 선택의 폭만을 가졌다. 일본 과학계는 점차 새로운 것을 거부하며, 제도권 대학의 지위를 흔들 수있는 새로운 도전들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8]

    일본이 과학 연구에서 자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위와 같은 봉건적, 분파적, 학벌적 상황을 파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30년대 등장한 연구 네트워크의 등장이다. 이 네트워크는 학벌, 분파, 봉건주의를 뛰어넘어 상호 영역에 참여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였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이들 네트워크의 참여 및 기여에 기존의 제도권 대학이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꿔 이야기하면, 비제도권에 대한 양성과 유지 혹은 최소한의 포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지금 한국의 과학계, 과학계 뿐만 아닌 학계 전체에 퍼진 교수에 의한 봉건적 구조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또한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신분적 계층화는 고질병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지식 노동시장의 상황이다. 당시 일본의 비제도권 과학자들이 자생하여 연구하고, 그들의 자체적 연구가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주류로써 등장할 수 있었던데에는 비제도권이 사회 속에서 혹은 적어도 학계 내에서 배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제도권 과학자 혹은 학자들은 대부분 월 50만원 수준의 대학 시간강사로써 생활하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 수준과 양식조차 제공할 수 없는 이 같은 환경은 자생의 씨앗을 말라버리게 한다. 또한 지금의 대학은 지식을 판매하는 기업의 논리로 학문을 접근하고 있다. 학문이 배고픔을 해결할 돈벌이의 수단으로 될 때 학문적 성과는 나타날 수 없으며 학문 그 자체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과학의 자생을 위한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로의 방향은, 1명이 100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어느 재벌회장의 논리가 아닌, 최소한의 보편적 생존가능을, 가치를, 목소리를 보장해 주는데 있다.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비제도권의 주류로의 등장으로부터 자연적인 사회적, 문화적 성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로부터 정통과 역사적 가치로부터의 과학에 대한 자생적 탐구와 노력이 수반 될 수 있다.


    [1] 김동원, 일본 이론물리학자 그룹의 등장, 계간 과학사상, 1994, 127-128
    [2] Ibid, 138
    [3] 버트런드 러셀, 러셀 북경에 가다, 천지인, 2009
    [4] 김동원, 일본 이론물리학자 그룹의 등장, 계간 과학사상, 1994, 132
    [5] Eikoh Shimao, “Some Aspects of Japanese Science, 1868~1945”, Annals of Science, 1989, 46, 69~91
    [6] 김동원, 일본 이론물리학자 그룹의 등장, 계간 과학사상, 1994, 133
    [7] Ibid, 138-142
    [8] Ibid,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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