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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
    과학 2012. 2. 2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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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객체를 정의하는 것은 객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서술함으로써 객체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객체의 정의는 정의된 개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여분의 개념을 배제함으로써 객체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우리는 자본주의의 개념과 실체를 보다 명확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개념의 정의는 객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확보하는 방법이 아닌 관련 개념들의 수평적 나열의 방법으로 객체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객체와 개념을 수직으로 나열해 객체를 규정함으로써 잘라져나간 외부 개념들을 함께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자본주의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이익 충동과 이윤추구, 교환가치, 손익, 관료주의 등의 여러 가치를 수평적으로 함께 나열함으로써 자본주의라는 인식의 중심으로 개념을 모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평적 나열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1]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정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타당할까? 이러한 질문은 물론 타당하다. 과학에 대한 정의는 과학의 발전과정과 그 형성 과정을 담은 과학사를 나열하여 분석하는 방식으로 과학이 갖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알 수 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기존 케플러의 행성궤도법칙을 모두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케플러의 관측으로부터 얻은 결론과 같이, 행성은 타원궤도운동을 하고 있음을 이론을 통해 입증했으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바탕으로 행성의 궤적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가능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직면한 위기는 천왕성의 관측이 이론이 예측한 것과 같은 완만한 타원궤적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위기는 태양계에서의 행성 수가 천왕성을 끝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이 예견한 천왕성 밖의 또 다른 행성은 이후 해왕성으로 관측되어 이론의 명증성을 다시한번 입증하게 되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법칙이 서술하는 명료함과 함께, 현재 운동 중에 있는 물체의 운동상태로부터 과거의 운동과 미래의 운동 상태를 추적,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동시에 이러한 예측은 실제 개입된 관찰 행위인 실험을 통해 명료하게 입증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예측된 시간의 상대성은 그 예측만으로도 매우 기이한 이론임에 틀림없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물체의 속력이 빨라질수록 시간은 지연되어 시계가 천천히 흐르고, 길이는 짧아진다는 예측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예측은 뮤온의 지상 관측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특수상대성이론으로부터 예견되는 효과들에 대한 실측과 실험으로부터 그것이 사실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양자역학이 서술하는 물리적 세계는 확률의존적 세계를 서술한다. 원자 내부의 전자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단지 확률적으로 어디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인지를 서술해 줄 뿐이다. 양자역학이 서술하는 확률적 세계는 관측가능한 영역의 실험에서 이론의 서술과 동일하게 관측되면서 이론의 명료함을 입증하고있다.

    현재 과학이라고 불리고 있는 몇몇 이론들의 역사적 발전 과정으로부터 과학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한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반증 가능해야 하며, 둘째. 관측가능한 의외의 예측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며, 셋째.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해야 한다.


    재단용 칼

    객체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규정은 객체의 외연적, 내연적 가치를 완전히 포함시킬 수 없다. 만일 어떤 객체를 단순히 정의한다면, 이 정의는 객체를 완전히 규정하지 못하고, 이러한 규정은 규정된 것과 규정되지 않은 것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 차이는 규정된 정의로부터 개체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러한 규정의 한계를 완화하기 위해 관련 개념을 수평적으로 함께 나열함으로써 잘려나갈 수 있는 외연적, 내연적 가치를 함께 포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방식으로 인해 객체를 규정하여 정의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정된 것, 규정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넓혀준다.

    정의의 기본적인 목적은 정의로부터 규정된 것과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로부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로부터 과학인 것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재단용 칼이 만들어 진다.


    점성술은 과학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남쪽에서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는 언명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문장은 오늘의 운세나 점쟁이들의 표현에서 잘 볼 수 있는 문장들로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문장은 언제나 참이다. 귀인의 정의와 기준의 문제가 모호하기 때문에 실제로 귀인을 만났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다. 또한 남쪽의 방향을 지시함으로써 반증가능성이 높음을 역설하는 듯 보이지만, 남쪽 방향에 대한 정보 역시 모호함으로 실제로 남쪽으로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귀인을 만났다면 위 문장은 참이고, 만일 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남쪽으로 충분히 가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귀인을 무시하고 지나쳤기 때문에 이 문장은 역시 참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 진다’로 요약되는 피그말리온 효과 역시 같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장이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 혹은 적어도 이 문장이 과학적이지 않은 근거는, 이 문장 역시 반증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간절히 원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관측가능한 예측으로부터 실제로 그것이 관측되었다면 이 문장은 참이며 동시에 과학적이다. 하지만 간절히 원했지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 문장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갈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성취 못했거나, 아직 성취의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르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은 결과와 상관없이 언제나 참으로 반증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성술은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창조과학은 과학인가?

    창조과학은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첫 째는 창조론의 이론으로는 현재의 관측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둘 째는 창조론의 이론으로는 실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의외의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반증가능한 이론이다. 신이 모든 것을 일시에 창조했다면, 일시에 창조하지 않은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이론의 모순이 발견되는 증거적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따라서 창조론은 반증가능한 이론이다. 

    창조론이 직면하고 있는 증거적 반증은 연대기별로 쌓여있는 화석기록과 탄소연대 측정으로부터 측정된 지층 및 지구의 연대이다. 만일 신이 일시에 모든 생명을 탄생시켰다면, 연대별로 구별되어 있는 지층에, 해당 연대에만 발견될 수 있는 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창조론이 사실이라면, 공룡의 화석과 인간의 화석은 같은 지층에서 발견 가능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화석기록은 이 사실을 긍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창조론은 지층의 지각활동으로 인해 동시대의 화석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층별로 뒤섞였거나, 사체가 물에 가라 앉는 속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지층별 화석기록이 발생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러한 가설 제시는 합당하다. 라카토슈의 연구프로그램 이론에 따르면 창조론의 견고한 핵인 ‘신에 의한 일시적 창조’를 보호하는 보조가설을 변형함으로써 이론의 핵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전원과 만유인력이 예측한 천왕성의 궤도 불일치 문제에서 나타난 방법적 문제이기 때문에 보조가설의 변경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창조론의 보조가설은 관측사실과 실험 가능한 의외의 예측을 역시 만족시키지 못한다. 진화론이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지층을 특정하며 이 특정 지층에서는 특정류의 화석만이 발견되며, 다른 화석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높은 증거적 위험성과 예측을 포함하고 있다는데있다. 또한 이러한 예측은 실제 화석기록와 관찰로부터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론은 관찰사실과 기록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창조론은 진화론의 반증가능성을 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창조론의 근본적인 오류는 반증가능한 전제로부터, 반증가능하지 않은 이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창조론은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심리학은 과학인가?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에 포함되는 과학이라는 수식어는 과학적 방법론을 인문사회학에 적용한 학문의 범주로써 이해된다. 때문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이들의 연구결과는 사변적 관념의 나열이 아닌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로써 이해되며 동시에 적용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의 현재의 지위와 이해, 그리고 과학적 방법론이 인문학과 사회학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의 명확성을 인정하지만, 과학적방법론의 적용은 과학의 범주로써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정의 내리려 할 때 문제가 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인간의 행동이나 상태를 예측할 때 상식에 근거한 추측보다는 심리학에 근거한 예측과 설명에 신뢰성을 갖는다. 심리학은 독심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은 과학적으로 그것이 증명되었거나 혹은 설명 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과학이라고 볼 수 있는가?

    심리학의 분야 중 가장 흥미있는 부분은 정신분석학이다. 가령, 한 남자가 아이를 밀어 고의적으로 물에 빠뜨렸다고 생각해보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남자는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요소인 억압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아들러의 이론에 따르면 이 남자는 열등감에 시달렸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남자는 이 열등감에 따라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만큼 용기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할 필요를 느끼게 되어 아이를 밀어낸 것이 된다. [2]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해석은 매우 흥미롭지만 반증불가능하다는 한계를 가진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이론은 언제나 들어맞으며 입증되기 때문에 반증불가능하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과학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이 아닌 심리학의 다른 분과는 대체로 과학적방법론을 따른다. 과학적방법론에 따른 실험 및 사례분석, 해석은 현재의 현상설명과 원인 분석의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유도된 심리학적 이론은 특정상황에 대한 인간의 행동양식을 예측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증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실험적으로 명확하고 정확한 입증과 예측의 방향이 매우 모호하다는 문제로 인해 반증가능하지 않다.


    잘려져 나가는 것

    과학이 가져야 할 세 가지 조건으로부터의 과학에 대한 정의는, 효과적으로 과학과 과학이 아닌것을 구분하는 도구로, 다시 말해 점성술과 창조론, 심리학 등을 배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객체를 완전히 규정함으로써 발생하는 규정되지 않은 것의 배제는, 정의된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것 혹은 규정되고자 하는 것을 배제한다.

    앞선 과학에 대한 정의가 가지는 맹점은 라카토슈가 반증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는 가공의 사례로부터 명확하게 나타난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한 물리학자가 뉴턴역학과 그의 만유인력의 법칙 N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초기조건 I를 근거로 하여 행한 계산에 의해 새로 알아낸 작은 행성 P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행성은 계산해서 찾아낸 진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뉴턴 이론을 따르는 이 물리학자는 뉴턴의 이론이 허용할 수 없는 행성의 일탈을 이론 N에 대한 반증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행성 P’가 존재해야 하며, 이 행성이 P의 진로를 교란시켰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존재할 것으로 여겨지는 행성의 질량, 궤도 등을 계산하여 실험 천문학자들에게 그의 가설에 대한 시험을 의뢰했다. 행성 P’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가장 큰 망원경을 통해서도 이 행성을 관찰할 수 없었다. 실험 천문학자는 연구소에 더 큰 망원경을 만들도록 했다.

    3년 후에 새로운 망원경이 만들어졌다. 만일 이 망원경을 통해 행성 P’가 발견되었다면 이것은 뉴턴 과학의 새로운 승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성 P’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과학자는 뉴턴의 이론과 교란의 원인으로 여겨진 행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포기했을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주진 때문에 우리가 그 행성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그는 이 우주진의 위치와 성질을 추정하여 그 추정을 시험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것을 연구소에 건의했다. 만일 인공위성이 추정된 우주진의 구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면, 그 실험 결과는 뉴턴과학의 놀라운 승리로 환호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과학자는 뉴턴의 이론, 교란의 원인으로 간주된 행성, 그 행성을 가리고 있는 우주진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을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우주의 어느 지역에 존재하는 자력장 때문에 인공위성의 기구가 측정을 방해받았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새로운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만약 자력장이 발견된다면 뉴턴의 과학은 극적인 승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력장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뉴턴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간주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 다른 기발한 보조 가설이 제안되었다.

    .....  [3]

     
    라카토슈가 만든 위의 가공의 사례를 과연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사례는 반증가능성으로부터 무엇이 진보하는 과학의 방향인지에 대한 맹점과 한계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과학의 세 가지 조건으로부터 정의된 규정을 과학으로 정의한다면, 이러한 정의로부터 유도되는 라카토슈의 가공사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만일, 라카토슈의 위 사례를 진보하는 과학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과학에 대한 인상과 관념에 모호성을 만들게 되며 또한, 이것을 진보하는 과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그 전제인 과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요구한다면, 기존의 과학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범주를 과학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역설적으로 과학에 대한 이 같은 규범적 정의는 과학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대물리학의 방향, 특히 입자물리학과 끈이론이 직면한 상황은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준다. [4] 그중에서도 끈이론의 문제는 보다 심각하다.

    끈이론은 우리의 우주에 10차원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시간을 포함한 4차원 공간이다. 끈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압축 차원을 고안해 냈다. 다시 말해, 여분의 6차원은 보이지 않는 작은 크기로 4차원 공간 속에 말려있다는 가설이다.

    1985년 필립 칸델라스와 게리 호로비츠 그리고 앤드 스트로민저와 에드워드 위튼은 여분의 차원을 압축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들은 칼라비-야우 다양체라는 복잡한 압축방식을 제안했다. 이것은 그 동안 차원 문제로 발생했던 입자 스핀의 구분과 반전 대칭성을 깨는 약력을 포함하는 표준모형의 입자와 힘을 재현하고 4차원 이론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압축된 여분의 차원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만일 이 같은 여분의 차원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압축된 여분의 차원이 만드는 흔적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것이 칼루자-클라인 입자이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끈이론 연구자들은 여분의 차원의 크기가 엄청나게 작은 플랑크 길이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이는 플랑크 에너지에서는 중력이 강해져 끈이론 같은 양자 중력 이론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데, 문제는 이러한 길이는 실험적으로 연구하기에는 너무 작은 규모라는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길이에 대응하는 칼루자-클라인 입자는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현재 입자가속기가 도달할 수 있는 질량보다 천만x천만 배 무거운 질량에 대응된다. 그렇다면 이 입자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우주가 4차원 이상이라면 우리가 아는 입자들은 모두 칼루자-클라인 짝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이 짝들은 알려진 입자들과 전하는 똑같지만 여분 차원의 운동량을 가질 것이다. 만일, 여분으로 압축된 차원이 있다면, 가장 가벼운 칼루자-클라인 입자의 질량은 여분 차원 크기의 역수에 비례하는 만큼 전자의 질량보자 커질 것이다. 즉, 여분의 차원이 커질수록 칼루자-클라인 짝의 질량은 작아지며, 여분 차원이 클수록 더 가벼운 입자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1000GeV 정도까지 작동하는 가속기에서 이처럼 대전된 입자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칼루자-클라인 입자는 여분 차원의 흔적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 입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여분 차원이 그리 크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실험적 제약을 감안한다면 여분 차원은 1억x천만 분의 1cm 보다 클 수 없다.

    원리적으로는 끈이론에서 말하는 끈의 가능한 모든 진동 방식에 대응하는 새로운 입자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끈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 하지만 끈이론에서 예측되는 새로운 입자들은 대부분 1억x10억 GeV라는 플랑크 질량 정도의 굉장히 큰 질량을 가진 무거운 입자만을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관측가능하지 않다. 실험적으로 측정된 가장 무거운 입자의 질량은 200GeV이다.

    끈이론이 예측하는 새로운 입자의 질량이 무거운 이유는 끈의 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끈의 진동을 통해 추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자의 질량은 클 수 밖에 없다. 끈의 장력은 플랑크 에너지에 따라 정해지며, 이 장력이 없으면 초끈이론은 중력자의 정확한 상호작용세기를 재현할 수 없다. 끈의 장력이 클 수록 진동을 만들기 위한 에너지는 커지며, 이 높은 에너지는 끈의 진동에 의해 생긴 여분의 입자들의 질량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러한 플랑크 질량의 입자들은 너무나도 무거워 현재 그리고 미래의 그 어떤 입자 가속기로도 만들어 낼 수 없다. [5]

    표준모형이 등장한 이후 수 년간 표준모형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실험 결과들이 다수 발견되었었다. 실험에 의해 나타난 표준모형의 이론적 예측 실폐는, 보조가설을 확장하여 그 문제를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이론체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그러나 더욱 세심한 실험 분석 결과 이 결과는 이론의 문제가 아닌 실험 결과의 잘못이었고, 이론이 복잡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적어도 표준모형은 반증가능한 이론이며, 실험적으로 관찰가능한 예측이 가능함을 보였으며 동시에 실험적으로 검증가능함으로 보였다. 반면 끈이론은 반증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실험적 검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지도 못한다. 끈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현재 관측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벼운 입자와 힘이 저에너지 상태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그 가벼운 집자는 보이지 않고 우리가 지금 보는 입자들만이 관측되는 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끈이론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것 조차 버거운 상황이며, 이론으로부터 예견 가능한 설명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끈이론은 표준모형이 실험적 검증을 통해 이론을 정교화하고 증명했던 것과 달리, 실험 결과와 일치하는 또는 실험 가능한 끈이론을 시도할 때 마다 이론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할 뿐 표준모형과 같은 단순한 일치를 보여주지 못한다. 따라서 끈이론은 실질적으로 반증불가능한 이론이다.

    앞선 과학의 세 가지 조건으로부터 규정된 과학의 정의에 따르면 현재 물리학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 끈이론은 반증가능하지 않으며, 새로운 예측과 실험적으로 검출 가능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기 않기 때문에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끈이론에 대한 규범적 정의를 제외한 체, 끈이론의 이론적 논의 방향이 과학의 진보적 방향을 따르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있는가? 이것을 판단하는 문제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끈이론이 미성숙 단계의 과학 이론이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적 방향의 초기단계임을 가정하여 이 이론이 과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판단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진보적 과학의 단계라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역시 끈이론은 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가 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반증가능성에 대한 이론의 진보 방향의 모호성을 긍정하게 되면서 과학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는 문제다. 과학을 세 가지 조건에 따라 규정한 과학적 정의에 따라 과학이 아닌 이론을, 과학의 어떠한 진보적 방향의 관념 혹은 믿음에 따라 과학임을 규정한다면 이것은 과학을 종교적 영역으로 치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에게 과학의 범주로 포함하지 않으려는 영역 즉, 정신분석학 및 심리학 심지어 창조론과 유신론, 점성술까지 과학의 범주로 포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심리학은 과학적방법론은 이용하며, 인간의 행동분석과 판단, 예측이라는 이론적으로 지향하는 진보적 방향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에 파생된 심리학의 이론은 따라서 과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창조론과 유신론 역시, 창조신에 대한 이론의 진보적 방향을 따르며, 그러한 확고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의 범주로 포함된다.

    후자의 경우 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심리학과 창조론, 유신론, 점성술 등을 과학의 영역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했지만 과학의 범주로 포함하고자 하는 영역을 과학의 범주에서 제거되는 문제는 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논의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린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이유

    과학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게 내릴 수 없는가? 과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영역은 포함되며, 과학의 범주에서 제거하려고 하는 영역은 제거될 수 있는 명확한 정의는 만들어 질 수 없는가?

    만일 과학에 대한 이러한 명확한 정의가 만들어진다면 전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슬픔에 빠질 것이다. 물론 명확한 정의로부터 앞으로의 직장을 잃을 우려 때문에 아직까지 명확하고 확고한 정의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학을 정의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명백한 규정으로부터 규정에 포함되는 것과 포함되지 않는 것을 구별해내기 위함 만이 아니다. 반대로 과학에 대한 역사적, 실험적, 이론적 관계에 대한 복잡하고 상대적 관계 속에서 과학의 내연적, 외연젹 개념과 관념, 본성과 지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함이다.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는 과학의 본성에 대한 탐구와 과학이 서술하는 법칙과 이론에 대한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물음, 그리고 변화과정에 대한 고찰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면서 동시에 명료할 수 없으며, 과학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 설명의 존재는 부정된다. 이것은 서두에 제시한 물음인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보여준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나열로부터 규범적 정의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나열로부터 개념이 될 수 없지만 그 만큼 되고자 하는 개념의 잉여를 외부로 포현함으로써, 인식되어야 할 사태 중심으로 모아, 잠재적으로 그것의 내적인 것을 규정하고, 사유가 필연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제거해버린 것에 사유하면서 도달하는 것이다. [6]

    따라서 과학에 대한 하나의 간단하고 보편적 설명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명료한 보편적 정의의 존재는 부정된다.


    [1] 이병탁, 주체객체 상호성으로서의 부정 변증법, 7
    [2] Dwakins, God Delusion, 80
           
    A.F. Chalmers,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1999, 104
    [3] Lakatos,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mes” in Lakatos and Musgrave, 1970, 100-101
    [4]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역학 특히 끈이론 등이 반증가능함에 대해 과학을 정의할 때 정말 과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한 부분은 다음에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그렇게 볼 수는 없다.
    [5] Petter Woit, Not Even Wrong, 2006, 266-270
           
    Lisa Randall, Warped Passages, 2005, 522-532
    [6] Adorno, T.W., Negative Dialektik, 1977, 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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