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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리학자 또한 철학자이다
    과학 2015. 6. 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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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Scientific American 에 기제된 ‘Physicists Are Philosophers, Too’ 를 번역한 글입니다.>


    편집자 노트 : 측정과 실험으로 자연의 궁극적인 실체를 명명백백히 밝힐 수 있는가? 철학은 현대물리학이 이룩한 성취로 인해 더 이상 쓸모 없어 지고 있는가? 현대 이론 물리학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과학의 경계선과 자연의 법칙에 대한 과학과 철학 사이의 오래된 분쟁을 본지와 함께 다루었던 빅터 스텐저가 지난해 8월,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이 글은 앞선 질문들에 대한 장엄한 논의와 더불어, 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을 당시 스텐저는, 그들 역시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위대한 철학적 전통에 몸을 담그게 된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 거두절미하고 스텐저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리학자 또한 철학자이다. 이 말은 이 글의 제일 마지막에 드러난다.


    이론 천체 물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렌스 크라우스는, 2012년 4월 The Atlantic에 기제된 인터뷰 기사, “철학과 종교는 물리학으로 인해 쓸모 없어 졌는가?”에서, “철학은 내용을 지녔었던 분야였다.”라고 언급한 것이 알려지자 철학자들에게 맹렬히 비난 받았다.


    불행하게도 철학은 우디 앨런의 오래된 농담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학문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고, 그들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체육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 중에서도 단연 최악은 과학 철학, 그 중에서도 특히 과학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과학 철학을 배운 다른 과학 철학자들이다. 


    과학 철학은 물리학의 발전에 그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대체 무엇을 정당화하고 옹호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조차 어렵고, 그 내용 마저도 상당히 기술적으로 씌여져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들을 읽는 철학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과학과 철학 사이의 갈등이, 철학이 지금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느낀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보하고, 철학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해 말, The Guardian의 The Observer 코너에서, 크라우스는 철학자 줄리안 버지니와 함께 친선 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에서 버지니는 과학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보였고, “물리학의 그것보다 경험세계의 그것이 더 낫”지는 않다는 데에 동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라우스가 “과학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은 과학적이지 만은 않은 인간 존재의 한 문제이다. 가령, 나는 일부 사실로 도덕적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항상 결정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표했다.


    크라우스는 그것을 그런식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대답 가능한 질문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둘 사이를 구분하고, 대답 가능한 질문은 대부분 “실증적인 지식의 영역, 이른바 과학”으로 분류하며, 도덕적 질문에 관해서는 오직 “실증적인 증거에 기반한.... 판단”에 의해서만 대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버지니는 “사실에 기반한 발견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항상 결정 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크라우스는 버지니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며, “나는 철학적 논의가 반영된 다양한 의견들이 의사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직 실증적인 탐구만이 실제 근본 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했다.


    The Atlantic에 기제된 크라우스의 인터뷰 기사는 다니엘 데닛을 포함한 유명 철학자들의 심기를 상당히 건드렸다. 그 때문인지, 2014년 Scientific American에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기제된 글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보다 신중하게 전개해 나갔다.


    활동하고 있는 물리학자들 처럼...... 나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던 많은 동료들은, 과학적 자연과 물리학에 관한 철학적 추측이 특히나 유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내 분야의 진척에 어떠한 조그마한 영향도 가져다 주지 않았거나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과학 철학을 정당하게 불러들일 수 있는 어떤 관련 분야라 할지라도, 나는 보다 유용한 물리학의 반영을 찾았다.


    철학에 대한 경멸을 가진 철학자는 크라우스만이 아니다. 2010년 9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는 “위대한 설계”를 출판하며, 그 첫 페이지에 “철학은 죽었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현대 과학의 산물, 특히 물리학이 이룩한 업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지식의 최전선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 왔다”라고 서술하며, 세계를 향해 총성을 울렸다.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자연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에 창조자는 필요한가? 이 질문들은 철학이 오랫동안 해답을 찾지 못한 것들이나. 그러나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철학자가 아닌 오직 과학자들 만이 이에 대한 유효한 답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기 과학자인 닐 타이슨도 이 논쟁에 뛰어 들었다. 2014년 5월, 팟캐스트 방송 Nerdist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점에서 갖는 나의 우려는, 철학자들 스스로가 자연에 대한 깊이 있고도 실질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왜 당신은 의미의 의미에 관여하고 있는가?’” 그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확실했다. 과학은 움직이고 있고, 철학은 수렁에 빠진 체 멈춰서 있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타이슨의 이 같은 관점은 맹렬하게 비난 받았다. 그의 입장은, 2010년 하워드 대학의 토론회에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앉아 토론을 진행하던, 당시의 영상을 보면 매우 명확해 질 것이다. 그는 철학에 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철학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안락 의자에 앉아 고뇌하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직설적인 주장했다. 타이슨이 설명했던 것처럼, 그러한 지식은 안락 의자에 앉아 고뇌하는 것만으로는 얻어 질 수 없으며, 오직 실험과 관측으로 만 얻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 역시 한 때 “탁상 철학자”에 대한 유사한 의견을 밝힌 바 있었다. 타이슨의 의견에 동의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루셀이라는 두 과학자에 의해 발견된 것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는 이런 부류의 논쟁들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는 “최종 이론의 꿈”을 출간하며, 책 속에 “철학에 반하여”라는 제목의 장을 따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가 제기했던 “수학의 불합리한 유용성” 문제처럼, 또 다른 당혹스러운 현상인 “철학의 비합리적인 무용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와인버그가 비판한 것은 철학 전체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일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이 목적인 과학 철학, 특히 그 중에서도 실증주의 철학이 가진 문제를 지적한다. 와인버그는 “실증주의가 이로운 만큼이나 많은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하며, “실증주의자들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과 같은 관측량들에 집중하는 것은 ‘실재론자’가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 양자역학에서 파동함수는 물리적 실재의 표현이다.”라고 썼다.


    어쩌면, 대부분의 영향력 있는 실증주의자는, 원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원자 모델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19세기 말의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와 같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터널링 현미경을 통해 원자를 볼 수 있지만, 우리의 모델은 여전히 쿼크와 같은 보이지 않는 입자를 상정한다. 때문인지 물리학자들과 더불어 철학자들 역시 실증주의를 장기간에 걸쳐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 결과 실증주의는 물리학에는 큰 영향력을 남지기는 않았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반면에 크라우스와 타이슨을 포함한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다룸에 있어 관측 만이  신뢰 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은, 이론이란 관측 사실을 예측하고 체계화 한 것을 분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도구주의적 성향으로 기운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는 쿼크와 같은 볼수 없는 입자들을 포함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최근까지 물리학과 자연 철학 사이의 이 정도의 커다란 간극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방 역사에서 등장한 최초의 철학자이자 최초의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는 탈레스 (circa 624-546 B.C.)를 보면, 그는 신화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물 위에 땅이 얹혀져 있고, 그 땅에 파도가 부딛히면서 생긴 것이 지진이라고 지진을 묘사하는 식이었다. 그의 지진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포세이돈 신이 삼지창을 땅에 내려 꽃아 생긴 것이 지진이라는 식의 신화적 설명 이상의 큰 개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탈레스는 개기일식을 설명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 탈레스의 가장 큰 기여는 모든 물리적 실체는 물과 같은 하나의 기초적인 성분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제안이었다. 물이 모든 기초를 이룬다는 탈레스의 가정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틀린 가정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한 호소 없이 자연의 물질만으로 자연을 설명한 것은 척어도 서방에서 벌어진 최초의 시도였다.


    탈레스와 다른 아오니아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은 물질이고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오늘날 물질적 일원론이라 불리는 현실관을 지지하고 따랐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물리학자들의 지배적인 관점으로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이론적 모델는 초자연적인 구성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도 모든 관측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타이슨이 찾아낸 균열의 시작 점은, 갈릴레이와 뉴턴으로부터 물체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기술하고 예측 할 수 있게 된 17세기 이후부터 였다. 뉴턴은 케플러에 의해 초기에 관측된 행성 운동의 규칙들을 자신의 첫번째 운동 법칙으로 모두 유도하고, 이로부터 1759년 헤리 혜성의 재등장하는 시기까지 정확히 예측해 보인것은, 관측된 일부 사실 만으로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새로운 과학의 위대한 시연이었다.


    뉴턴 물리학의 이 같은 성공은 태엽시계 우주관으로 알려진 철학적 관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체계에 따르면, 운동 법칙은 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모두를 결정한다. 특히, 이 관점은 우주의 활동 규칙을 서술하는 데에 신이 존재 할 여지를 두지 않았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피에르 시몬 라플라스가 보여준 것처럼, 뉴턴 법칙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행성 운동을 설명하는 것 자체로도 충분했다. 이것은 물리적 우주를 이해하는데 물리학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심지어 뉴턴 조차 거부했던 이 급진적인 개념으로 그를 이끌었다.


    태엽시계 우주관은 오늘날에 와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완전히 틀렸음이 입증되어졌다. 때문에 이를 다루는 양자역학은 철학적으로 지독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따라서 물리학은 물질 세계를 “이해한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물리학적 모델은 ‘우리의 눈과 장비로 관측 할 수 있는 물질 세계를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20세기 초,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닐슨 보어, 에르빈 슈레딩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등의 유명 물리학자들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철학적 문제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이후, 리처드 파인만과 머리 젤만 그리고 스티븐 와인버그, 쉘든 글라쇼 등의 차세대의 물리학자들은, 전 세대에서부터 시작된 그런 비생산적인 논의를 이어나갔고, 결국 어떤 철학적 원칙을 채택했다. 이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대세를 따랐다.


    가령, 와인버그가 “파동함수는 물리적 실제의 대표”라고 양자역학의 “실재론자” 같은 설명을 지지했을 당시, 양자장론의 양자장과 같이 이론에 포함된 이론가들의 인공물이 현실의 궁극적인 재료임을 내비쳤다. 2012년 이론 물리학자 데이비드 통이 Scientific American에 기제한 글에서 그는, 우리가 실험으로 관측한 입자들은 환상이며, 그것이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물리학자들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와인버그에 의견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물리학자들은 반복해서 전자나 쿼크와 같은 개별 입자가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 건설 블럭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우리 이론의 건설 블럭은 유체와 같이 공간에 퍼져있는 어떤 장場이지 입자가 아니다.


    이 관점은 완전히 철학적이며,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쁜 철학적 생각으로 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와인버그와 통의 이 같은 견해는 사실 많은 이론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실제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을 일반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들은 현실의 궁극적인 자연 형태에는 일대일 대응이 존재 할 것이라는 방정식과 모델을 가지고 있다.


    스텐포드 철학 백과사전에서, 마크 발란게르는 플라톤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플라톤주의 [Platonism]는 궁극적인 실제 속에 추상적인 객체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객체라는 것은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완전히 비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어떤 객체이다. 이 관념 속의 플라톤주의 [Platonism]는 동시대의 관점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견해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으나, 여기에 정의된 바와 같은 의미로 플라톤이 실재로 사용했는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플라톤주의 [platonism]라는 용어는 소문자 ‘p’로 씌어진다.


    우리는 이론물리학의 모델 중, 객체가 현실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것에는 소문자 ‘p’로서의 플라톤주의[platonism] (이하, 플라톤주의)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델이 순수 사색에 기반하고 있지 않고 관측 결과를 예측하고 묘사하는데 알맞게 만들진 것이라면, 이것은 대문자 ‘P’ 로서의 플라톤주의 [Platonism]로 쓸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플라톤적 실재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관측을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인지 도구인 감각 넘어의 거짓으로 현실을 결부 짓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물리학 모델을 시험하기 위해 현실에 부합하는 모델의 기초를 연역한다. 그러나 이들 모델은 다촛점 망원경이나 가속기 실험실의 입자 검출기에서 흘러나온 데이터와 함께 비교되어진다. 이것은 특정한 모델이 현실로 향하는 길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이터이다. 만일 모델이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 모델은 현실과 분명한 연관을 가지지 않는 것일 테고, 만일 데이터와 일치한다면, 아마 그 모델은 현실과의 어떤 연관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연관이란 무엇인가? 모델은 물리학 건물의 이론 부서 안에 있는 화이트보드 위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선이다. 이 구불구불한 선이 데이터와 맞지 않는다면 쉽게 지워진다.


    크라우스의 개인적인 물리학 철학 속에 숨어있는 플라톤적 생각의 흔적은 Scientific American에 기제된 글에서 드러닌다.


    일부 물리학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위해 수 많은 가설을 만들고 또 폐기해 왔었다는 사실 자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수준이다. 최근 내 책 ‘無로부터의 우주’에 그런 철학자가 쓴 리뷰 ......... 이 작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이 있음을 주장했지만, 그가 가진 물리학에 대한 배경 지식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물리학의 법칙은 입자와 장이 존재하는지를, 그리고 공간 자체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자연의 본질이 되는지를 절대 역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게 휘어진 시공간 속의 현대 양자장이론의 배경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다.


    단도직입으로, 실제 자연에 대한 플라톤적인 물리학 이론의 일치는, 와인버그와 통 그리고 크라우스가 그러 했던 것처럼 문제 투성이다. 


    첫째, 이론은 주지하다시피 일시적이다. 가령, 양자장이론이 입자나 장에 대한 언급 없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훨씬 명확한 이론으로 교체될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하며, 우리는 그 시기는 예측 할 수도 없다. 둘째, 모든 물리학 이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양자장론 역시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이 끼워 맞춘 모델이다. 우리는 이론 모델들이 현실 세계에서 잘 부합하는지를 시험하지만, 양자전기역학과 같은 높은 예측성을 갖춘 모델 조차, 얼마만큼 ‘현실’에 부합하는지를 절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그들이 하고 있는 주장은 형이상학인 것이다. 만일 그곳에 궁극적인 현실을 결정하기 위한 실증적인 길이 있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이 아닌 물리학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주의자의 관점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현실의 기초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도구주의적 관점은 현실에서의 관측만을 강요한다. 당연히 이 같은 관측은 관측 결과를 묘사하기 위해 이론가들이 발명한 수학적 모델인 일대일 대응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은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이론 모델들은 관측 결과를 설명해야 하지만 이를 위해 형이상학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모델들을 설명하기 위한 고비는 과학 서사의 중심이 될 것이긴 하나, 이는 모델의 예측 능력과 묘사 능력 보다 우선시 되진 않는다. 양자역학은 이것의 가능한 좋은 예이다. 왜냐하면 합의된 철학적 해석이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을 비판 할 때, 현실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을 지니는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한 사람의 교리를 채택한 것이다. 철학자가 그들을 만든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모델의 수학적 기초에 대해 설명하거나, 우주의 구조에 짜맞추듯 도입한 물리학적 법칙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만, 플라톤주의의 경계에 가까워 지지만.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사실상 완전히 성장한 플라톤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와인버그와 호킹, 믈로디노프, 크라우스, 타이슨 등의 결점은 수학에만 치중한 나머지, 윤리적, 미학적, 정치적, 어쩌먼 인식론과 같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식 영역에 충분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점이다. 크라우스는 그런 중요한 주제에 약간의 립서비스를 지불하지만 전혀 열정적이지 않았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당연히 형이상학적 가치관으로 우주의 기원에 관해 서술하며, 형이상학자들은 기본적인 과학지식도 없이 우주를 다루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물리적 추측이든, 그들이 비판하는 형이상학이든, 사실은 신학에 기반했던 중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주의 근원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 탁상의 형이상학자들은 죽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에 정통한 철학으로 대체된 것에 다름 아니다.


    크라우스가 과학철학에 가장 맹렬한 비판을 쏟아 부었던  “철학과 종교는 물리학으로 인해 쓸모 없어 졌는가?” 라는 인터뷰가 비록, 철학을 위해 한 것은 아니었을 지라도,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터뷰에서 언급된 그의 우주론에 관한 책을 보면, 최소한 인식적 영역 내에서는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추측을 시도했었다는 것이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학계와 대중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철학의 부문들도 많이 있지만, 이들 중에 형이상학은 없다. 문제는 단순하다. 형이상학이 합리적으로 잘 묘사된 현실로 연결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처럼, 우리가 언급한 유명한 물리학자들이나 같은 진영에 있는 다른 과학자들도, 우주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들은  완전히 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 이미 강조한 것처럼, 그들 모델의 형이상학적 객체의 실재성을 고취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이 형이상학임을 지각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플라톤적 형이상학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플라톤주의의 맥락을 수용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관측만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사고에 머물러있다는 점이다.


    호킹과 믈로디노프는 “철학은 모델이 아닌, 현실에서 독립적인 개념이다”라고 말하며, 플라톤주의를 명백하게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물리학 이론은 수학적으로 서술된 이상이며, 그 구성요소들을 관측하고 연결시킨 것이 바로 물리학의 체계이다.”라고 주장하며, ‘모방의존실재론’이라고 불려지는 철학적 원칙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들을 이 원칙을 분명히 했다.


    “모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직 관측과 일치하느냐 아니냐 만이 의미있다.”


    우리는 모방의존실재론이 도구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두 경우, 물리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오직 관측에만 관여하고, 비록 그들이 일부 궁극적 현실의 결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관측을 묘사한 모델이 현실에 정확하게 대응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고집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사례에서  호킹과 크라우스는,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수 있는가를 논의하는 철학자들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답변이 “아무것도 없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논의로부터 철학을 비판하는 모든 비평가들 역시 어떤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들은 그저 전문적인 철학자들 보다 과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고, 순수 사색보다는 실험과 관측에 더욱 의존할 뿐이라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철학은 축지 않았다. 다만, 그 방식과 명칭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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