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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님의 코끼리와 코끼리
    과학 2013. 8. 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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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통은 소와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발톱은 범과 같다. 털은 잿빛이며, 귀는 구름장처럼 드리웠다. 눈은 초승달 같고, 코는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으며, 코 끝은 누에 꽁무늬 같은 것이, 코끝으로 물건을 끼워말아 두루 났는다.”


    이 글은 박지원의 ‘연암상기’에 묘사된 코끼리의 모습으로, 언젠가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소개되어 기억에 남아있는 내용이다. 코끼리에 대한 위와 같은 묘사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코끼리에 대해 설명해 주는 듯한 느낌을 전달해 준다. 어떤 부분은 소와 같고, 어떤 부분은 범과 같으며, 어떤 부분은 초승달과 같고 또 어떤 부분은 자벌레와도 같다는 이 설명들은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공통점과 경향성 마져도 찾아보기 힘들어 보인다. 말 그대로 장님의 코끼리이다.


    오늘날 우리는 코끼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거창한 설명과 묘사들을 필요치 않는다. 코끼리라는 하나의 단어가 가지는 추상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 들임으로써 코끼리를 코끼리로써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암상기에서의 코끼리에 대한 묘사가 코끼리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이 묘사와 설명으로부터 우리가 코끼리를 유추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조금 묘한 질문 두 가지를 던져보자. 장님의 코끼리는 코끼리가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코끼리는 코끼리인가? 이 두 가지 질문으로부터 어떤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설명 혹은 정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준다. 대체 무엇이 코끼리인가?


    장님의 코끼리는 개념을 병열적으로 나열하여 설명하는 방식과 같으며, 우리가 알고있는 코끼리라는 단어는 명증적인 단 하나의 정의로부터 추상되는 개념 또는 형상과 같다. 이 둘을 편의상 ‘장님의 코끼리’ 방식과 ‘코끼리’ 방식이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장님의 코끼리 방식은 코끼리를 정의하고 서술하는데 코끼리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병열적으로 나열해 하나의 통합적인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단 하나의 간명한 정의를 들어본적이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단일적 존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과 정의는 언제나 스미스, 맑스, 베버, 케인즈, 시장, 돈, 국가, 관료주의, 기업, 신용, 화폐 등과 같은 개별적 개념들의 병열적 설명으로 그 정의를 대체한다.


    반면 코끼리 방식은 단 하나의 규격화된 정의를 바탕으로한다. ‘과학 이론은 반증 가능한 이론’이라는 과학에대한 칼 포퍼의 정의와 같은 명증한 정의를 말하며, 이 같은 설명 방식은 그 명확성과 엄밀성 때문에 대게의 경우 장님의 코끼리 방식에 비해 상당히 선호 받으며 또 그러한 욕구를 받게 된다.


    “하루는 아이들(딸아이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을 찾아가 함께 과학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수행한 과제 중에는 전기가 통하는 물체와 통하지 않는 물체를 알아보는 것이 있었다. 전지와 전구를 전선 몇 개로 연결한 뒤, 아이들은 다양한 물체를 두 전선 사이에 끼워서 전구가 빛을 내는지 못 내는지를 관찰했다. 만일 전구가 빛나면, 그 물체는 도체이다. 그리고 도체는 대부분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음이 드러났다.(클립, 열쇠고리, 치아 교정기 등) 하지만 곧 아이들은 크게 놀랐다. 연필심(흑연)은 다른 도체들같이 광택이 나지도 않고, 금속처럼 생기지도 않았는데 전기가 통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사실 왜 흑연이 여러가지 금속과 차이점이 있는데도 도체로 작용하는지 알고 있다.” [그레고리 N. 데리,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p491-492]


    과학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위의 인용문은 그레고리의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짧은 글로부터 우리는 과학이라는 것, 과학적 연구 활동과 과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과학에 대한 명증한 정의와 설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다. 서술적이며 경험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서술되거나 경험되지 않은 것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앞선 연암상기에서의 코끼리의 서술이 그러했듯이, 이 꼬끼리에 대한 묘사는 코끼리의 각 부위별 세부적인 묘사와 그것의 합으로써의 코끼리의 개념적 서술은 가능하지만, 서술하지 못한 부분을 빠뜨리게 된다.


    “과학은 경험되는 현상에서 그 현상을 발생시킨 어떤 것을 찾아 나가는,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이 도약 과정에서 인간은 귀납과 연역뿐 아니라 가추와 역행추론으로 불리는 다양한 사유 방법들을 동원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며, 통계나 모델 구성이나 실험 등은 다양한 사유 방법을 경험적으로 체현하는 것이다. 이때 과학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추정하여 사유 속에 재구성한 실체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 자체는 구별되며 유사할 수도 상이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기각, 수정, 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앤드류 콜리어, 비판적 실재론]


    잘 정리된 하나의 정의는 바꿔 이야기하면, 배제함을 의미한다. 정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배제함으로써 정의를 확고하게 만들어 낸다. 확고한 정의와 개념은 그 정의와 가치로부터 또다른 논의와 개념의 논의로 이행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주며, 이 논의과정으로부터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 또한 개념의 병열적 서술이 그러했듯이 배재함으로써 포함되어야 할 요소, 혹은 가치를 잘라내 버리게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장님의 코끼리는 코끼리 그 이상을 보여주거나 설명하는데 한계가 존재한다. 반면 코끼리는 코끼리가 배제해버린 다른 개념들로부터 코끼리를 모두 보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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