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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자에게 통섭과 융합이란
    과학 2013. 9. 11.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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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부터인가 통합과 융합의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제는 통섭이라는 유령이 몇 년째 온 나라를 뒤덮고있다.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꺼내놓으며 우리는 Technology와 liberal arts 사이에서 제품을 만든다는 말에 다시 한번 인문학 열풍이 불어 닥쳤다. 마치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인문학을 알지 않으면, 공자왈 맹자왈 하지 않으면 안되는 듯이 이야기하며, 기업 CEO들 조차 강연회에서 과학, 공학, 인문학 등을 모두 알아야만 그것이 인재라고 말하고 있다.


    한 개인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은 하나의 분과 학문 마져도 모두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전문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지식세계에 모든 학문을 섭렵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특히나 그 칼날을 과학자과 공학자들에게 들이밀며 인문학을 외치는 모습은 그들이 통섭과 융합을 외치기 이전에 학문을 과학을 그 시스템부터 이해하고 있는지를 의심케한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역사상 과학과 기술은 크게 다른 종류의 활동으로 분류되어 사용되었던 개념들이었다. 과학의 탐구 및 과학 인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의 발달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밝혀내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기술은 과학과 인간의 실천적 필요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과학기술’이라는 통상적인 용어 사용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하나의 상호의존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밀접한 상호관계를 맺고 있으며 과학의 발전은 기술에 의존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 역시 과학적 발견에 의지하게 된것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의 접점에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첨단산업과 첨단과학의 모습이다.


    브레이버맨은 이러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과학은 마지막으로 자본의 부속물로 전환한 사회적인 재산”이며, “18세기 후반부터 1830년대까지 발생했던 산업혁명과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어 현재까지 진행 중인 과학기술혁명과의 차이”는 “생산에 우연적으로 관계되는 일반화된 사회적 소유물로서의 과학과 생산의 중심에 위치하는 자본가의 소유물로서의 과학과의 차이”이다. (Braverman, 1989: 140) [1]


    기술이 과학을 토대로 발달하기 시작하며 기술은 전문과학노동이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되었다. 이는 기능적 목적으로써의 기술과 자연의 탐구 목적으로써의 과학으로 분리되었던 두 개념이, 사회적 생산과 기술의 생산설계 등에있어 과학의 발달 수준과 과학적 결과물의 실천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이윽고 과학은 자본자의 목록에 하나의 항목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2차세계대전과 정보화혁명에 따른 대량생산과 기술의 혁신은 이윤을 내기 충분한 규모의 공장과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거대 독점 자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과학 자체도 이에 맞춰 대자본의 투자가 필요해지기 시작하며, 과학의 거대화가 진행되었다.


    이와같은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과학이 우리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지속적으로 넓혀져가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 자체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발달하는 전문영역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20세기 이후부터 고등과학은 일상 경험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고, 다년간의 대학원 교육을 받지 않고는 실행 될수고, 이해조차 될 수 없는 종류의 지식이 되며, 그 적용범위 역시 상당히 좁아졌다. [2]


    과학이 여러 전문분야들로 세분화 되면서 과학자들 마저도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학 발전의 내용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화를 낳았고, 그 결과는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 혹은 과학기술의 부작용과 문제점들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반감이라는 양 극단으로 나타났다. 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의 과학기술자들은 더 이상 창조적인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 속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단순한 전문기능인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


    과학과 과학자의 불행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극대화한다. 기계화의 진행에 따라 노동자를 관리에 의해서 조작되는 만능기계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노동과정의 주체적 요소로서의 노동을 파괴하여 객관적 요소로 만들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업종 및 직종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작유형에의해서 더욱 많은 노동이 지배될수록, 노동은 점점 그 구체적인 형태를 상실하고 일반적인 형태를 띠게된다. 


    이와 같은 작업의 실행를 지적인 작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위계조직, 육체 및 정신노동자의 통제, 수익성 등 인간적인 욕구 이외의 모든 것에 가장 적합한 기술적 조건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기계화는 노동을 조직하여 기계 주위에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지만, 이러한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결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킨다는 관점에서 추구되거나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본축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것이며 사회를 전반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게 만든다. 따라서 산업이 발전할수록 노동자들은 점점 더 그 산업에 대한 적은 지식만을 갖게되며, 자본주의의 진보는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간국을 넓히고 노동자를 한층 더 확고하게 기계의 멍에에 종속시킨다. [5]


    자연의 순수한 탐구와 연구 활동은 이제 더이상 수순한 진리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거대화된 과학 연구 속에서 과학자 개인이 이해하고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최소화되었음을, 어쩌면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렇다면 왜 과학자 개인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통섭을, 융합을 요구하고 있는것인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국가가 순수과학연구에 투자하고 지원을 장려하는 이유는 기껏해야 순수한 연구가 언젠가는 유용한 무언가를 생산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거나, 노벨상 수상과 같은 국위선양을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섭과 융합의 유행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간의 융합과 통섭은 어느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수퍼맨 형의 통섭과 융햡이 아닌 조금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에코는 나르키소스만을 사랑한다. 타고난 수다쟁이였던 숲의 요정 에코는 다른 요정과 밀애 중인 유피테르를 찾고 있던 유노를 방해하고 만다. 수다로 유피테르가 도망치는  것을 도와준 것이다. 화가 난 유노는 에코에게 다른 사람의 마지막 구절만 반복할 수 있는 형벌을 내린다. 에코는 언어를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에코는 사냥을 하다 홀로 숲 속으로 들어온 나르키소스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만큼 아름다웠던 나르키소스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을 사랑한다. 이런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에코는 자기를 사랑할 수 없다. 더구나 에코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 사랑을 고백하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그녀는 모든 사랑을 거부했던 나르키소스의 끝말만을 되풀이하게된다. 사랑이 커질수록 실연의 고통은 더 깊어지고, 다시 그 만큼의 사랑이 커진다. 


    고통의 순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한 에코의 몸은 아름다움을 잃고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남의 말만 되풀이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되돌아온다. 에코의 비극은 나르키소스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자기를 상실하 사람의 가장 큰 비극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에코는 그녀의 사랑을 처참하게 물리치며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나르키소스의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그의 말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6]



    자신 바깥의 타자를 인정하지않고 철저히 배격하는 나르키소스는 안과 밖을 구분하고 안을 경계지운 다음 밖을 배제시키는 모습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밖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 속에 갇힌 채 밖과 대화하지 않는 나르키소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탐닉한다. 자신 속에 사로잡힌 사람의 비극은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만을 옳다고, 타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과와 문과의 경계와 구분은 이들 각각을 나르키소스로 만들고 말았다. 과학은 자연의 객관적 진리 탐구라는 목표 아래 근대 과학기술이 이룩한 문명으로부터 자만과 오만을 키워왔으며, 현대의 자본주의는 과학연구에서 인간을 배제 시키기에 이르렀다.


    과학자에게 있어 혹시 통섭과 융합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적 지식 습득이라는 또 다른 학습의 역설이 아닌, 두 나르키소스간의 대화와 소통이라 말하고 싶다. 인문학의 주 목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자연을 대상화하고 타자화 시켜온 과학에, 부품화된 과학자에 타자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인정하고 지배나 위계없이 함께하는 것이다. 



    [1] 강성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2호, 19 (2010)

    [2] Ibid, 23

    [3] 김영식, 박성래, 송상용, 과학사, 전파과학사, 1992, 12

    [4] 거대과학 시대의 과학, 과학기술자, 민중, 116

    [5] 해리 브레이버맨, 노동과 독점자본, 까치, 160-161, 181-182, 203 (1989)

    [6] 박구용, 에코의 비극, 사회와 철학 연구회, 사회와 철학 17권 1호, 145-14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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