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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 개념의 변천사 (1)
    과학 2018. 8. 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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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제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속력 혹은 중력의 세기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을 상식처럼 알고있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분명하게 공간과 시간이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공간 내에 존재하는 물질 역시 공간에 의존하지 않은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념을 곧바로 추상화하고 관념화 시켜버렸다. 공간이 수축하고 시간이 늘어난다는 감각 수용을 위한 어떠한 즉각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떻게 이 추상적인 관념을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당연하게도 우리가 공간과 시간을 통합한 오늘날의 공간 개념을 가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수 백년에 걸쳐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기인한, 독립적이고 등방적이며, 연속적인 공간과 시간에 대한 모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수 세기에 걸쳐 위치와 물질에 대한 원시적인 감각경험을 토대로한 추상화한 개념들 혹은 신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공간에 대한 개념은 이렇게 상당히 극적인 변화를 겪어 왔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가 바로 아인슈타인에 의한 공간 개념의 변혁이다. 인간의 감각 경험은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에서의 추상화, 관념화, 개념화 과정은 어쩌면 합리적 추론의 영역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인데, 아인슈타인의 발상은 이것을 초월하는 그 무엇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직관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감각경험과 직관에만 의존하고 있는 공간 개념에 머물고 있었을까? 공간이라는 개념과 관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그 념은 어떻게 발전하고 변천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여기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가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려한다.



    고대의 공간 개념


    데모크리토스에게 공간은 단지 물질의 운동을 포함할 뿐 물질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무한의 빈 확장이었다. 후대의 로마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는 그의 논문 ‘우주의 본성’에서 다음과 같이 우주의 크기는 무한 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만일 우선 모든 존재하는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면, 사람이 그것의 바깥 경계를 향해 달리다가 가장 끝에 서서 창을 격렬한 힘으로 빠르게 던졌을 때, 그것을 보내진 점 보다 앞서서 더 멀리 날아갈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중간에 끼어들어 그것을 멈추게 할 것인가? 당신은 두 가정 중에 하나를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데, 둘 중 어느 경우이든 당신은 이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고 우주가 끝없이 확장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의 기본적인 생각은 공간의 경계나 끝은 공간의 끝이라고 가정되는 곳인 ‘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은 우주의 범위가 무한함을 증명하기 위해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에 존재하는 물체를 포함하는 무한의 우주는 무한의 공간을 암시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공간은 물질이 위치할 수 있는 무한의 그릇이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물질과 공간은 서로 벗어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론’에서 이상적인 국가와 그 국가를 통치하는 철인에 대해 역설한 것처럼, 경험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감각경험의 세계를 믿지 않았고, 지적인 사람에게만 보이는 변하지 않는 현상의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플라톤에게 있어 참된 지식이란 실재적이고 안정적이며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믿음은 외형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참된 지식은 불변의 유일한 주체라고 보았고, 믿음은 사실과 거짓일 수 있는 반면에 지식은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물리적 대상의 세계를 감각 경험의 자료에 의존하지 않는 불변의 형상으로써 물질을 기하학적 세계와 일치 시키며, 세상을 구성하는 네 개의 기본 원소를 다음과 같은 규칙적인 공간 구조로 가정했다. 20면체인 물과, 8면체의 공기, 4면체의 불 그리고 6면체의 흙이 그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이 물체의 자연스러운 운동을 결정하므로 물질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했다. 그의 책 ‘정치’의 한 구절에서 이 내용을 이렇게 서술한다.


    “더구나 기본적인 자연체-다시 말해 불, 흙과 같은 것들-들의 전형적인 운동들은 위치가 특별한 무언가일 뿐 아니라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방해받지 않는다면, 각각은 그것의 고유한 위치로 가게 되는데, 하나는 위로 다른 것은 아래로 옮겨진다.”


    공간상의 다양한 영역의 상이한 조건들은 물체가 적당한 위치를 향하는 자연스러운 운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관찰자의 관점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존재를 가정하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감각경험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플라톤은 실재를 즉각적인 감각 경험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긴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물질이 구분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경험과 실재 세계를 분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과 공간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을 통해 본유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감각경험과 관찰을 통한 추상화가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유효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어떤 탐구의 대상이 원리, 조건,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 때, 지식을 얻는 것은 이러한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의 일차적 조건이나 제1 원리를 알게되고 그것의 가장 간단한 요소들로 환원될 때까지 분석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에 있어서, 다른 분야의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무엇이 그러한 원리들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행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은 우리가 더 잘 알고 있고 분명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더욱 반영하고 더 잘 알 수 있는 것들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Aristotle 1942b, BooK 1, Ch. 1, 184]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경험 또는 실제 세계의 자료로 부터 출발하여 이로부터 일반적 법칙이나 규칙을 이끌 필요가 있음을, 그리고 지각 가능한 세계에 대한 모든 일반적인 질문을 할 때는 항상 경험적 부분을 고려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그의 감각 경험으로부터 추론된 물체의 운동과 우주의 형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절대적인 가벼움은 위쪽으로 혹은 극한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고 절대적인 무거움은 아래쪽으로 혹은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가볍거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것은 크기가 같고 무게가 다른 것에 비해 자연적인 낙하 운동의 속력이 더 작은 것을 의미한다.” [Aristotle 1942c, BooK 1, Ch. 6, 273]


    “흙은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더 빠르게 운동하고, 불은 위쪽에 가까워질수록 그러하다” Aristotle 1942b, BooK 1, Ch. 8, 277]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체의 운동은 물체 그 스스로의 성질, 경향 혹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불과 같은 가벼운 원소의 성질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흙과 같이 무거운 원소는 아래로 가는 것이 그 물체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물체가 가진 목적인은 그의 우주관에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생물체들이 목표와 목적을 향해 행동하고 인도되는 것과 같이, 무생물체의 행동 역시 그와 같은 목적인에 의해 행동한다고 가정한다면, 우주의 중심을 찾는 것이 흙의 본성이기 때문에 지구 자체는 우주의 중심에 그 중심을 가져야 하고 그 모양은 구의 형태여야 했으며, 지구의 모든 부분들이 모든 방향에서 우주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침내 서로 부딪쳐서 구체를 형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천체는 변화하지 않는 불변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천체의 자연스러운 운동은 원이 되는 것이 타당했으며, 변화와 타락은 지상 세계의 현상이기 때문에 지구는 하늘과 매우 다른 본성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같은 인과론적 공간 개념은 수 세기에 걸쳐 필사되고 변역 되었으며,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끊임 없이 해석되어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같은 우주관과 운동에 관한 해설은 수 세기에 걸쳐 그 영향력을 행사해 갔으며, 심지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 까지 경험과 상치된 관측이 발견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을 도그마 하여 사실이 아닌 그의 원리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의 많은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왔던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일어난 균열은 그가 물체 운동의 원리에 도입한 목적인 개념이었다. 비생물체는 생물체와 달리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달성할 수 없으므로, 물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체에 전달되는 부여된 힘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식 우주관의 균열


    6세기의 그리스 기독교 철학자 플로포누스는 그의 저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대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 완전히 잘못된 그리고 논리적인 증명보다는 관찰된 사실에 의한 진위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무게의 차이가 많이 나는 두 개의 질량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들은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그 움직임의 시간적비는 무게의 비를 따르지 않으며, 시간의 차이는 무게의 차이에 비해 아주 작다. 따라서 만약 무게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예를 들어 한 물체가 다른 것의 두 배가 되지 않으면, 시간의 차이는 전혀 없거나 아니면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Cooper 1937, 47; Cohen and Drakin 1987, 220]


    여기에서 필로포누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질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그마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물체가 운동할 때 통과하는 매질은 운동의 원인적 요인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역시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질에 관한 두 가지의 상이한 개념을 제시했는데, 하나는 물질 목적의 동인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운동이 무한대가 되지 않도록 방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필로포누스는 이렇게 반론한다.


    “한 사람이 힘을 주어 돌을 던질 때, 돌 뒤에 있는 공기를 밀어서 돌이 자연스러운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게 되는가? 아니면, 돌을 던진 사람이 돌에 준 기동력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많은 고찰로부터 강제된 운동이 위에서 언급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어떤 무형의 기동력이 투사자로부터 투사체에 주어진 것이고, 투사체의 운동에서 공기는 거의 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더 타당하다. 만약 강제된 운동이 내가 제안한 것과 같이 일어난다면, ‘자연을 거스르는’운동, 즉 화살이나 돌에 강제된 운동은 물질에 충만한 공간에서보다 텅 빈 공간에서 훨씬 더 잘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리고 투사자 이외의 어떤 다른 요인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Cohen and Drabkin 1948, 222-223]


    여기서 언급한 무형의 기동력은 ‘부여된 힘’에 대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 물체의 초기 운동에 부여한 힘이 매질 속을 유영하며 주변으로 점점 흩어져, 결국 물체는 정지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관념을 견지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질은 불필요 한 것이 된다.


    두 번째 균열은 천체 운동의 관측에 의해 나타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천체 운동에 대한 도그마는 천체의 운동이 완전한 원을 따라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우주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 놓으며 하나의 균열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등속원운동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점에 있어 여전히 완전한 원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속에 있었다. 덕분에 천문학적 관측 데이터와의 정량적 적합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심원과 동심원 이외에도 대원과 주전원과 같은 30개 이상의 원이 필요해야했고, 정확성의 측면에서 행성 역학의 문제를 해결해 내는데에 실패했다.


    여기서 균열에 쐐기를 박은 것이 바로 티코 브라헤가 남긴 수많은 관측 자료들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모델을 부정확하게 관측한 결과를 토대로 끼워 맞추려하고 하고 있을 때, 그에게 행성의 지속적인 위치와 천 여 개에 이르는 별의 위치에 관한 보다 정밀하고 방대한 양의 관측 자료를 제공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는 1572년, 천구상에서 달보다 바깥에 있는 별들은 불변한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과 정면으로 배치 되는 관측을 얻은 것이다. 이로써 코페르니쿠스가 의지하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절대 불변의 우주관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완전한 원운동이라는 도그마는 여전히 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629년, ‘세계의 조화’를 펴낸 케플러에 의해 완전한 기하학적 구조의 우주라는 믿음은, 수학적으로 간결하게 서술된 세 가지의 법칙으로 완전한 균열에 이르렀다. 이 유명한 세 가지 법칙은 각각,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을 따라 돈다, 제2법착 : 태양에서 행성까지 그러진 반경벡터는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면적을 쓸고 지난간다, 제3법칙 : 행성의 주기 T의 제곱에 대한 행성궤도의 평균 반지름 R의 세제곱의 비율은 태양계 내의 모든 행성들에 대해 일정하다.




    이 1700년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벗어나 서서히 독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의 첫번째 저서인 물리학에서 기술한 공간과 물질을 시계에서 불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동이 6세기 필로포누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네번째 저서인 천체의 관하여에서 기술한 지구 중심론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겨우 무너지기 시작하여, 17세기 갈릴레이에 와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개념이 무너지고 새롭게 재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 케플러가 보인 행성의 타원운동, 즉 완전한 원형의 이론적 모형이 부정됨을써 절대적 존재자 혹은 완전한 존재자에 의해 설계된 우주의 모습이 부정된데 영향을 받았다. 이 같은 기조는 데카르트에 이르러 신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여 인간 스스로의 독립의 시작을 알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는 끝을 맺게 되었다. 칸트와 데카르트의 영향아래 지속되었던 지적 풍조는 절대적 존재자가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을 확립했고, 기계론적 세계관의 잇따른 성공 뒤에 드디어 뉴튼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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