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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에서의 측정에 대한 단상
    2017. 11. 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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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 한켠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낡고 커다란 국어 대사전을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양손으로 조차 들기 힘들어하던 커다란 사전을 학교까지 짊어지고, 교과서에 나온 단어들을 찾아보던 초등학교 시절의 작은 일화 때문이다. 


    사전은 언어로 표현되는 단어의 정의를 수록 하고, 단어의 정의를 파악함으로써 전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러나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문장을 그리고 언어를 이해할 있을까? 당시의 기억이 하나의 그림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에는 언어의 순환성에 대한 발견의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사전을 통해야채 찾아보면채소라는 단어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고, ‘채소 찾아보면야채 다시 한번 맞이해 뿐이었다. 이외의 단어들 역시 정의 내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단어의 정의로 다리만 건너면 금방 원래의 단어로 되돌아 뿐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고, 정의에 다른 정의를 필요로 하는 순환성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당시에 찾아 보았던채소야채 예에서 처럼,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정의보다는 추상화된 이미지로써의 선험적 지식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우리 언어의 본성과는 달리 후기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속에서 순환성을 가지지 않은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절대적 가치 기준 혹은 언어가 등장 하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함께 쌓아 올린 근대 문명은 이렇게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양화된 것으로 보이는 가치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정확한 길이와 정확한 시간, 정확한 질량, 정확한 온도의 측정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정밀해지는 측정의 기준과 그에 대응하는 숫자들은 우리를 점차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바꿔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측정과 계산을 신뢰하는부분이라는 플라톤의 말이 무색 하기라도 하듯, 과학 혁명기를 거치며 향상된 정밀도와 성공적인 자연의 객체화로 인해, 결국은 하이데거의 우려 처럼 측정이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이 아닌유일한방법으로 둔갑하게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이미 순환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선험적 경험이나 이해를 요구하는 불완전한 체계임을 알기에, 언어로부터 파생된 과학의 언어와 측정이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고 유추해 있다. 1미터의 정의가 광속의 역수에서 파생되고, 광속은 미터의 역수에서 파생 되며, 시간의 정의에 의존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우주 상수의 대부분은 이미 순환적이다. 


    중에서 여전히 킬로그램의 기준을 우주상수가 아닌 질량 원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비객관성의 대표적인 예이다. 1879년에 제작되어 현재까지 질량 원기로 사용 중인 백금 이리듐 합금 원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포가 빠져나오면서 점차 질량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도량 기준의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우리 우주의 질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문제로 인해 최근에서야 플랑크 상수를 이용한 새로운 질량 기준으로 대체할 계획 [1] 이지만 여전히 길이와 시간의 정의에 의존하고 있는 불완전한 기준임에 틀림없다. 또한 질량 원기의 제작과 기준 정립 뿐만 아니라, 길이, 시간, 온도 등의 측정 기준 정의는 상호 순환적이고 이론 의존적이며 협약주의적인 면이 언제든 뒤따라온다.


    보다 정밀한 측정 기준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 공동체가 오류를 수정하고 개선해 나가며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다원화 진보의 과정으로 있다. 그러나 탐구와 가설 설정, 결함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과학의 발전과 함께 요구된 높아진 정밀도는, 크고, 작고, 알맞고, 적당히 라는 말들을 비객관적인 유물로 취급하고, 정확한 숫자만이 자리를 대체해갔다.


    평평 지구설에서 백신접종 거부 운동에 이르는 반지성주의의 원인이 과학 문명의 고도화에 따른 양화된 가치 기준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과도한 해석 이겠지만, 사유를 잃어버리고 절대 시험 기준에 매몰되어 유희를 사치로 바꾸어 버린, 가치가 상실된 현대사회의 풍경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는 없을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찍힌 작은 점이 주변의 백색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절대 측정의 기나긴 여정이 과학의 풍경을 보게 만들어주기 보다는, 그렇게 현대 사회에서의 측정 행위들에 대한 사념들로 모두 잠식되어 버렸다. 그리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무엇을 측정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확한 도량형과 정밀한 측정 기술로 인류가 접한 파동 중에 가장 미약한 파동인 중력파의 측정을 성공으로 이끌고, 보다 정밀한 반도체 제작 기술로 오늘날의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암흑물질을 검출하기 위해 미세한 전류의 변화를 감지하는 감지기를 개발하고, 태초 우주의 모습을 관측하기 위해 매우 정밀한 온도 측정 기술과 기준이 필요했다. 이러한 모든 측정과 측정 기술의 발달이 자연의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고 파악하는데에, 그리고 우리의 문명 발전에 보탬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측정 기준을 비생물이 아닌 생물에 적용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IQ 지수와 EQ 지수, 신장, 몸무게, 시험 점수, 학교의 순위, 연봉의 액수 헤아릴 없을 만큼 우리를 규정하는 측정값들이 즐비해있다. 측정 기준으로부터 우리는 평가받고 재단되며, 가치 지어진다. ‘캠퍼스, 저울, 자는 생명이 없는 물건 에나 갖다 대는 이라고 말한 폴란드의 어느 시인이 남긴 잔향처럼, 현대 사회에서의 측정은 가치를 거세해버리고  도구 만이 남은 상태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냈다.


    측정의 역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절대 측정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아닌, 측정의 대상이 어디로 향해야하는지를 끊임 없이 질문하게 만들어 준다. 온도계를 만들고, 자를 만들고, 질량 원기 등을 만들어서 어디에 무엇을 측정 것인지, 무엇을 대상으로 측정을 하면 안되는 지에 대한 논의도 이제는 시작되어야 해볼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도구를 걷어 치운 자리에 사유와 철학을 담아두고 조심스럽게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 본다 




    측정의 역사 - 8점
    로버트 P. 크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에이도스



    [1]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7102602736&Dep0=news.goo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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