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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춘들에게 고한다, 분노하라
    2011. 7. 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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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의 초중고등학교들은 일 년에 한 번정도 수련회를 하게 된다. 이 보편적인 일정에 맞춰 당시 학교에선 조금 특별하게 수련원이 아닌 학교내에서 야외 숙영을 하는 계획을 마련하였다. 학생들은 기대하였고 학무보들 역시 찬성하였다. 마침 수련회 당일이 되자, 학교측은 금일 우천을 이유로 급작스럽게 예정의 취소를 알렸고, 통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것이라 알렸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당일 날씨는 우천의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였으며, 아주 맑은 날씨 때문에 학생들은 이 같은 조치를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학생의 대부분이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학교측과 교사들은 황당해 했고, 일부 교사들은 이런 학생들의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으며, 진정하고 달래기 바빴다. 야외 수련회의 일정 취소라는 거창하지도 않고,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지금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면 당시 느꼈던 부조리와 일방적 조치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목소리이자 요구 즉, 분노의 표현이었다.

    지금의 대학가의 분위기는 놀라우리만큼 차가워졌다. 정치, 사회적 문제와 연일 터져 나오는 이슈들로 뜨거워 미칠 지경이어도 모자랄 판에 대학가는 놀라울 정도로 차갑다. 만일 이들에게 사회 운동참여를 권한다면 아마 콧방귀를 뀔 것이다. 취업 전선 아래 개념을 상실한 인간이라는 비판, 혹은 운동의 결과 사회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는 회의의식, 그 결과 취업에의 악영향을 우려하는 현실적 의식들을 보이며 말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무관심하게 만들었는가?

     

    무비판적이며 수동적인 대중

    국가의 교육제도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구성품으로써의 가치를 함양시키기 위한, 산업화 수요에 의해 만들어 졌다. 산업화 사회에서 요구하는 구성품으로써 갖춰야할 과목들은 흔히 어렸을 적 즐겼던 음악, 미술 등에 대한 관심과 환상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공포의 주입으로부터 산업화 사회에서 요구하는 과목들이 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강조하며, 학습능력이란 곧 지성이라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국가가 시행하는 공교육은 국가가 국가 장래를 위해 필요로 하는 인재 혹은 대상들을 공장에서 찍어 내듯이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활용하는 측면이 매우 강하다. 이 때문에 문제점을 파악, 반성하며 각 개인의 지성에 대한 깊은 고찰과 창의력의 가치를 끌어내기는 커령 하나의 구성품으로써 그 모든것이 거세당한다.

    문제는 공교육에 의한 타의적 거세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어릴 적 가정 교육에서부터 취미, 적성, 능력 따윈 모두 거세시켜 버린 체 공부타령만 하고, 중고등학교로 가면 두발단속에 교복으로 개성마져 거세당한다.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들을 보며 노숙자들을 양산하고 이를 방치하고 있는 사회구조와 복지 수준에 대한 비판 혹은 남을 도우며 살라는 가르침 대신 부모는 아이들에게 너도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며 겁박을 준다.

    20년이 지난 아이들의 모습은 공교육과 가정교육의 실체로써, 자유의사 결정권과 문제 해결능력을 스스로 망각하고 주체적 판단과 사유를 포기한체 자기계발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스팩은 이런 자위의 실체이며, 하나의 공산품화 되어버린 개인의 가치 즉, 잉여인간의 시대에서 실패의 책임을 스팩의 부재라는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한다. 문제는 자유와 개성, 주체적 판단과 사유 따윈 버린체 그리고 실질적인 자기계발은 망각한체, 일반적으로 만들어진 틀에 무비판적으로 스스로를 맞춰나간다.

    만일, 취업이라는 하나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 전선에서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 토익 공부에 열중이 보편적이며 획일화된 특징을 떠난 이탈자들은, 개인의 자유 선택의 인증이 아닌 루저나 낙오자로 취급하는 보편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 결과, 대다수의 대중들의 행동반경과 사고의 내용은 평이하고 정형화 되며, 전반적으로 폐쇄적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때문에 단순 정치구호에 선동되기 쉽다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 안주로의 변화 [1]

    과거 근대사를 살펴보자.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자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온다. 그 결과 국민은 1964년에서 65년 사이에 행해진 한일협정과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은, 일제 식민 통치로부터 받은 굴욕의 역사를 돈에 의한 한 번에 정리에 버리는 매우 치욕적인 회담으로 받아들여 졌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 문제에 즉각 반발하였다. 당시의 시대정신은 민족적 자존심과 불합리에의 저항이었다.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시기에 들고 일어났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에도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7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 혼란을 틈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1988년 하반기 이후 점차 높아만 가는 학생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무력 탄압을 자행한다. 그 과정에서 고문에 의해 박종철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렇게 6월의 항쟁은 시작되었다.

    국가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전두환 정권의 비윤리적, 인권탄압적 상황 속에서도 국민의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으며 마침내 독재 정치는 종지부를 찍는다.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라'

    그간의 항쟁과 투쟁, 분노의 목소리 이렇게 순식간에 죽었다. 더럽고 치사해도 참기만 하면, 나중에 억압받는 입장에서 타인을 억압할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서 당한 만큼 밟아주겠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1997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IMF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만 같았던 아버지들이 명퇴의 칼날에 휩쓸려 나가자, 학생들은 국가와 사회라는 대의가 아니라 당장 우리 집이, 그리고 나 자신이 훨씬 중요하고 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닳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는 현실성 없는 공허한 허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고, 당장의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나간다.

    등록금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데모해봐야 바뀌는 것도 없으니, 그냥 편하게 사는게 중요할 뿐이다. 괜히 데모 했다 빨간줄이라도 그이면 취업에 문제가 생길 뿐이니 회피하는 것이 좋다.

    무비판적이며 수동적인 대중의 현실안주화의 결과는, 취업전선이라는 공동의 목표와 가치아래 회의적으로 변한다. 이렇게 개성을 거세당하고, 스스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틀 속에 들어가 팔 다리를 잘라가며 스스로 틀에 맞추려 하며, 주체적 판단과 사유 기능을 스스로 망각한 체 인간임을 포기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예에서처럼, 스스로 매트릭스를 구동하기 위한 하나의 건전지가 되기를 원할 뿐이며, 당당하고 거침없이 어디선가 세뇌되어 왔던 이야기들과 타자의 말들로써 스스로 객관화란 이름으로 포장하며 파란약을 집어 삼킨다.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

    지금까지 행한 무관심의 결과를 현실로써 스테판 에셀이 이야기한 것,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 그토록 노래 부르던 취업이 대기업 위주의 기형적 기업구조와 소득불균등 분배로 인해 일자리 수를 더욱 감소시키는 결과만 가중되었으며, 덮어두고 토목 건설이라는 돈에만 관심을 두다 구미 단수사태를 맞이하였으며, 윤리와 정의 사회에 무관심한 결과 삼성의 반도체 생산라인에선 백혈병 환자가 또 다시 발생하며, 나와 가족, 친구의 학업, 연애, 취직, 결혼, 육아, 교육, 노후, 보험, 건강, 취미생활까지 문제가 발생한다.

    에셀은 이야기한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 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를 그는 비판한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며,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그는 외친다.

    현재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와 산업화시기로부터 나아지지 않은 초기 자본주의의 생상위주식 사고방식이 그대로 본재하고 있다. 때문에 항상 더 많은 물량과 더 낮은 임금과, 더 낮은 원가, 더 높은 생산 속도, 그리고 더 높은 자본의 추구만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러한 태도와 결별해야만한다. 연일 외치는 선진국 대열의 합류라는 것은, 기술과 금융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윤리와, 정의, 지속가능한 균형의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않된다.

    무관심의 결과 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내 몰린 상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하는 것이다. 분개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것이다. 봉기하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의식을 갖는 것이다.

     

    200년 전에 노예 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 당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가 찾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책 서두 중에서.

     

    [1]표철민, 제발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 링거스그룹, 2011, 1부


    분노하라 - 10점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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