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전문 기능인으로서의 과학자
    과학 2013. 10. 9. 03:34
    반응형


    "수년간 날 갖고 온갖 실험을 다 했잖아!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야. 난 지금 약이 필요해. 프로그램 약. 그 약은 어디에 있지?"

    "나한텐 없어요"

    "거짓말 마!"

    "정말 나한텐 없어요"

    "당신은 그저 고용인일 뿐이다?"

    "그 큰 집에 보안 등급도 높고 놈들의 살해 표적이 되었는데도 아는게 없다?"

    "난 과학자일 뿐이라구요! 당신들이 밖에서 무슨일을 하는지 우린 몰라요"

    "4년이야! 순진한척 하지마. 모른다니 말이 돼?"


    영화 본 레거시의 한 장면이다. 제거 대상이 된 프로그램 번호 5번의 요원이 자신을 실험한 과학자를 찾아가 프로그램과 약에 대해서 묻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답변만을 듣게 된다. 그 과학자는 심지어 그 프로그램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논문조차 쓸 수 없었으며, 학술회의 조차 참석할 수 없었던 상항에 본인 역시 피해자임을 역설하며, 계속되는 질문과 추긍에 과학자일 뿐이라는 변명만을 늘어 놓는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과학의 급격한 발전


    19세기 이전에는 자연과학조차도 자연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다른 영역의 지식과 뚜렸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18세기를 지나면서 등장한 산업혁명은 경험 산물로써의 물질화가 아닌, 과학이론으로부터의 물질화라는 관점이 자리잡기 시작하며, 과학이 기술 진전의 절대적인 선결 요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연과학은 점차 전문화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자연철학의 한 요소로써 기능했던 지식의 한 분야가 아닌 과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인으로서의 과학자가 등장했다.


    산업혁명으로부터 이어진 기술의 진보는 다시 과학의 진보를 이끌어 나가는 형태의 사회적 생산과정이 발전함에 따라 간접적으로 진행되었던 자연발생적 혁신 대신에 기술과 생산설계의 계획적 발전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과학지식은 자본가의 대차대조표 중 한 항목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


    이 같은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명백한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20세기에 전면화된 독점과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의 제국주의적 경쟁이 놓여있다. 특히 이 시기에 나타난 대량생산과 같은 새로운 기술혁신은 이윤을 내기에 충분한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자본의 양을 독점자본만이 감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과학 자체도 대자본 투자가 필요해지면서 과학은 독점의 형성을 돕게 되었다. [2]


    20세기에 이르러 과학기술 혁명은 더 이상 산업혁명처럼 몇 개의 주요한 발명이나 특수한 혁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재능을 계획적인 과학 연구로 대체시킴으로써 생산양식을 산업 생산적 기능 혹은 일상적 기능으로 얼마나 잘 통합 시킬 수 있는가의 역량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엄청난 양적 성장으로 나타났다. 1896년에 5만명에 불과하던 전 세계 과학 연구자의 수는, 1972년에 활동적인 연구노동자 수만 최소 100만명에 이르렀으며, 산업체와 정부 및 교육계의 과학노동자는 100만명에 육박했다. 1980년대 말, 연구와 실험 개발에 실재로 종사하는 전 세계 과학자와 공학자의 수는 약 50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3]


    이러한 높은 성장률은 그 내면에 산업과 정부가 점점 더 과학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과학 연구 또한 비용의 증가에 따라 대기업이나 정부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원인엔 제2차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긴박감이 있었다. 전쟁은 정부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양의 자원을 과학연구에 바치는 것이 실행 가능할 뿐 아니라 앞으로는 반드시 필요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납득시켰다. [4]


    미국의 경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1957년까지, 연방 자금이 지원된 연구의 80% 이상이 국가 안보상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었다. 미국식 연구중심대학의 창설과 미국의 경제성장에서 핵심에 위치한 기술집약 사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국방부 자금지원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민간 연구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고도의 정치적 요구가 나타나면서, 이후 10년간 민간 연구에 대한 지원에서 가장 큰 몫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냉전 시기 국방 연구의 기술적 부속물에 불과했던 유인 우주 프로그램이 차지하게 되었다. [5]


    1950년대 초에 접어들 냉전 시기 미국이 자임한 지정학적 책임의 규모와 복잡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국방부와 고위 과학 행정가들 사이에서는 연구개발이 단지 특정한 무기 체계를 제공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범위에 걸친 잠재적 국방 응용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과 혁신, 기술적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으로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과학-군대 연계는 전후 연구 체제의 모든 부문을 끌고 갔고 또 지탱해 주었다. 지식생산 과정은 기초과학에 속한 특정 분과 학문의 기중이 아니라 군사적 필요에 따라 명시된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되었다.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민간기업과 여러 정부 기구들을 포함하는 국방 기계의 핵심 부속품으로 여겨졌다. [6]


    과학자에게는 지식의 최전선을 어슬렁거리는 괴짜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종종 이론가, 실험가, 엔지니어들을 모두 포괄하는 다재다능한 연구 집단 속에서 함께 작업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입자가속기 같은 연구 도구가 기초물리학의 순수 연구하고 이름 붙일 만한 연구를 수행하는데 쓰일 때도, 거기 들어가는 자금은 국방부와 원자에너지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한 연구 도구는 군사적으로 응용될 수 있는 기술을 시험하는 소중한 기회였고, 냉전 시기에 차세대 무기를 만드는 데 기여할 과학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7]


    전문 기능인으로서의 과학자 [8]


    이러한 냉전적 기원으로부터 꽃을 피운 연구 조직에서는 물리학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물리학이 기술 개발에 기여한 역할에 의해 정당화되었고, 연구조직은 과학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연방 기구 사이의 의존 관계로 특징지어졌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맨하탄 프로젝트이다.


    맨하탄 프로젝트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전까지의 과학연구활동과 그 규모면에서 뚜렸이 구분되는 특징을 보인다. 총투자액은 20억 달러 이상의 금액이 투자되었으며, 오펜하이머, 보어, 페르미, 질라드, 콤프턴, 플랑크 등 당시 매국내 최고수준의 물리학, 화학 연구자들이 총망라되었다. 또한 로스알라모고도 연구소의 연구인력은 3천명에 달했으며, 핸포드의 플루토늄 생산시설 및 오크리지의 우라늄 정제시설, 시카고 대학의 연쇄 반응로 등을 포함한 외부연구관까지 포함하면 전체 연구인력은 만 단위, 그외 기능인력과 행정인력까지 포함하면 10만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이 같은 막대한 규모의 연구계획은 그 규모의 효율적인 운영의 필요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 대부분을 수동적인 존재로 격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막대한 자금과 거대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통제하는 것은 과학자의 역할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관료와 기업가의 영역이었고, 때문에 맨하탄 계획의 운영권이 과학자의 손에 주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구계획의 전반적인 운영과 중요한 결정의 대부분은 군부와 정부관료들, 특히 계획의 총책임자인 육군공병대의 그로브스 준장과 참모장교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과학자들은 단지 결정된 계획을 집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멘하탄 계획에 참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단순히 주어진 일만을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적 존재였다. 실제로 로스알라모고도에서 근무한 3천명의 과학자들 중 자신들이 하는 일의 정모를 알고 있는 과학자는 극소수의 상급과학자들 뿐이었고, 대부분은 거대한 연구계획 내에서 주어진 극히 작은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원폭 개발의 전체 연구과제는 몇 백개에 달하는 소과제들로 분리되어 있었고, 이들은 또 다시 각각의 연구반 별로, 그 내에서 각 연구자별로 분리되었다. 과학연구의 거대화가 가져온 결과는 연구과제의 세분화와 극도의 분업화로 이어졌다. 


    이렇게 과학이 여러분야로 세분화되면서 과학자들 마저도 자신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학 발전의 내용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전문화는 과학자들조차 그 배후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하거나 변경할 필요가 없는 과학기술의 작동으로 이해하게되며, 이러한 추세는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화를 낳았고, 그 결과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 또는 과학기술의 부작용과 문제점들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반감이라는 양 극 단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9]


    이제 과학연구는 과학자 개인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 속에서 주어지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공으로써의 능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의 과학자 개인은 자신의 활동이 갖는 사회적 결과에도 무관심해지는 성향이 드러나게되었다.


    본 레거시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정부, 기업, 기관 등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거대과학 속의 소외된 과학자의 모습 보여주고 있다. 그저 고용된 과학자일 뿐 밖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전문지식을 갖춘 지식노동자의 모습을.



    [1] 강성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제7권 제2호, 19-20 (2010)

    [2] Ibid, 20

    [3]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 20세기의 역사, 문학과지성사, 1990, 715

    [4] J. D. 버날, 버날 과학사 3, 한울, 1998, 33-35

    [5] 대니얼 리 클라인맨, 과학기술민주주의, 갈무리, 2000, 149

    [6] Ibid, 150-151

    [7] Ibid, 151

    [8] 최영준, 거대과학 시대의 과학, 과학기술자, 그리고 민중, 중등 우리교육 06, 115 (1997)

    [9] 김영식, 박성래, 송상용, 과학사, 전파과학사, 1992 12장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 x Aptun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