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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과학문화는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야하나과학 2014. 1. 6. 01:46반응형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현대레알사전 이라는 코너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코너였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라는 단어를 재정의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재정의 될 것인지 기대반 궁금증반으로 지켜보다 개그우먼이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나의 또 다른 생일’ 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는 산타할아버지가 되는 날로, 서비스업에 종하는 사람들에겐 지옥의 날로, 어쩌면 연인이 없는 사람들에겐 쓸쓸한 하루로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지 모르듯이 어떤 단어, 어떤 날, 어떤 물건 등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는 그 수 만큼이나 모두 다를 것이다.
때문일까. 날씨가 추워지며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문득 생각 나는 한 사람이 있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해 겨우 읽고 쓰는 교육만 받았던. 제본소 수습공에서 영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로 꼽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길 거부하고,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고 꿈조차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과학강연을 하게 해달라고 말했던. 그. 마이클 페러데이가 떠오른다.
“어떤 다이아몬드가 이 불꽃 만큼 아름다울 수 있겠니, 양초의 불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불꽃이 없다면 결코 빛날 수 없단다.”
페러데이가 양초 한 자루를 들고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크리스마스 강연 중 일부이다. 다이아몬드가 왜 아릅답냐는 질문에 빛이 있기 때문이라는 답은 다소 선문답 같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출중한 인물이나 그의 성취가 실은 그가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의 산물이라는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에서 대중적 이해와 지지가 있을 때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고 작품이 나오는 것과 같이, 과학에 있어서도 국민대중의 저변이 넓고 두터워야만 그 토대위에서 훌륭한 과학자가 나오고 괄목할 만한 업적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많은 정치가나 지식인들은 입만 열만 ‘과학기술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에만 그치고 있을 뿐 실제로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나 일반대중들은 ‘과학기술이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
지난 60년대 이후 계속하여 과학기술입국이 정부의 중요한 정책목표가 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대중의 의식, 태도는 과학문맹 대중을 양산하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의 표현처럼, 하나의 다이아몬드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수 많은 양초의 불꽃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나, 철저히 다이아몬드 발굴에만 염원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더욱 많은 변화를 가져올 터인데, 그 변화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반대중이 과학에 관한 기본적 이해를 가져야 하고, 민주사회에서 그런 경우 대중은 전문가 손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분변력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스티븐호킹, 과학에 대한 대중의 태도, 시사저널 38호 (1990)]
사실상 과학기술은 특수한 사람들만 하는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호킹의 말처럼 과학기술은 이미 우리의 일상 생활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써의 가치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은 어렵다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 일지도, 어쩌면 호킹이 보인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과학자들의 역할 회피 일지도 모른다. 뉴욕타임즈와 같은 권위있는 신문에선 과학관련 뉴스가 1면을 장식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하는 언론의 역할과 태도의 문제 일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 이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두고 이를 인지하고 바라보는 정부와 국민대중의 전근대적인 과학문화의 수준을 질타하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서구의 근대 과학과 과학문화를 우수한 것으로, 도달해야할 절대 선으로 가정하고 오늘날의 한국 과학문화를 비교한다면 이같은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보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전근대에 머물러있는가? 정말로 우리는 전근대적 과학문화에 머물러 있는것인가? 한국의 과학문화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한국의 과학문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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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 이후 문화의 융성과 발전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송대의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중세 이슬람 등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대부분 발전이 정점에 이른 이후 200~300년에 걸쳐 고착화, 침체 그리고 쇠퇴로 이어지는 수순을 밟았다는 것이다. 반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루어진 과학 혁명은 앞선 여타의 사례들과는 달리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속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래된 새로운 문화는 이를 받아들인 문화를 변화시킨다. 또한 받아들인 문화 역시 전래된 문화를 변화시킨다. 단일 문화와 문화 사이의 전래를 다룸에 있어 중요한 것은 전래된 문화, 그것이 과학이라면 전래된 과학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문화가 전래되면 단순히 수용되거나 거부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용되거나, 차용, 적응, 편입, 토착화 과정을 거치거나 때로는 무시, 고립, 저항, 거부, 충돌 되는 양상을 보이기도한다.
송대의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중세의 이슬람 권에서 발생했건 과학혁명과 그 문화는 발전의 점정에 이른 이후 무시, 고립 그리고 타문화권과의 충돌에 의해 쇠퇴되어 나간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7, 18세기 당시 동아시아로의 서양과학의 전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
서양 과학지식이 당시 널리 그리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서학중원론西學中源論’의 영향이 크다. 이는 당시 중국으로 들어온 서양 과학 지식의 기원이 고대 중국이라는 것으로, 고대 황금기에 중국에 그 같은 지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는 소실되어 오랑캐들의 손으로 들어갔고 서양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계승 발전시켜 중국으로 다시 가져왔다는 생각이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현상을 잘 대변해 주는 대목이기도하다. 타자을 객체화시켜 그 기원을 주체인 자신에게서 찾음으로서 자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타자에 의한 지식의 전달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서학중원론은 중국이 서양의 과학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정당성의 한 논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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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 학자들 중에서도 이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의 역사적 맥락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17세기 말 명이 만주족의 지배하에 들어가며 명의 마지막 황제가 명의 멸망을 개탄하며 자살한 사건이 알려지며,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조선중화론’과 ‘존주론’등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랑캐 서양인이 가져오고 오랑캐 청이 받아들인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 정당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던 중요한 수단이 바로 서양 과학의 중국 기원론이었던 것이다.
17세기 초 서양의 과학 지식이 조선에 유입될 당시, 이 지식은 조선의 지식층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지식인들은 점진적으로 이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당시 많은 조선 학자들이 특히, 일식의 추산에서 전통적인 역법보다 더 정확한 예측이 입증된 서양 천문학을 수용했다. 심지어 조정이 앞장서서 서양 천문학에 기반한 시헌력을 채택하기도 했으며, 서양식 세계지도가 조선 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지리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7세기 조선에서 서양 과학지식의 전파는 그 정당성의 확보와 함께 비교적 쉽게 수용되어 나갔다. 18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학자들은 ‘주역’에 기반한 전통적인 우주론에 서양 우주론의 일부 지식을 비교적 쉽게 통합시키며 서양 과학지식을 빠르게 편입, 토착화 되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당성의 논리였던 서학중원론과 조선중화론 그리고 존주론에 의해 나타났다. 17세기 전반 만주족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이후 조선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강한 반오랑캐적 감정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또한 이상적인 문명으로 간주했던 고대 주 왕조의 문화를 숭배하는 존주론이 조선 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며 중화를 위해 오랑캐의 천문지식을 정당화해야할 필요성이 절실해 진것이다.
그 결과 고전의 비판적 탐구를 통해 자기반성적인 전통의 정화와 재검토의 노력이 일어났던 청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층 더 강하게 전통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내보였다. 청에서는 송명 시대의 정주 성리학을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었지만,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심화 발전이 일어났다. 역학에 대한 두 나라의 태도도 상이했다. 청은 본질을 오염시키는 과도한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 반면, 조선의 학자들은 이런 요소를 더욱 깊이 발전시키는 작업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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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 열강의 무기와 기술의 우월함 그리고 그것이 주는 위협을 통감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가치와 문화는 근본적으로 유지한 채로 나라는 부유하고 강하게 하는 수단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동양의 정신, 가치, 문화는 그대로 살린 채 서양으로부터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도구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이 그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동도서기론은 점차 서양문화의 다른 영역과 완전히 분리하여 그 과학 기술만을 도입할 수는 없고, 따라서 서양 과학기술과 함께 그 근본이 되는 서양 문화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자라난데 비해, 한국에서는 서양의 과학 기술이란 순전히 실용적인 도구에 불과하고 서양 문화의 다른 요소들과 분리해서 별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 지속된 것이었다.
이같은 인식은 서양 과학지식이 서양으로부터 직접적인 전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되거나 이후 일본을 매개로 접하게 되었다는 점과, 20세기 초 한국의 국가적 불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적 불행의 열패감과 원인을 서양 과학기술의 비적극적 수용에서 찾으며 등장한 맹목적 과학주의가 만병통치약으로 받아들여지고, 20세기 전반에 걸쳐 등장한 나라의 부강, 경제적 효용과 이식에의 주된 촛점이 그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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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주변 지인들에게 과학에 대해 가지는 본인의 생각과 과학 대중화에 대해서 가지는 의견을 간단하게 물어보았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소위 이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과학을 즐겁고 재미있는 것으로, 그리고 과학 대중화는 이러한 재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것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소위 문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경우 과학은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과학대중화에 대한 의견도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한국에서의 과학은 우리의 문화 속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유리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의 주변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 사이에 깔려있는 동도서기론은 과학기술이 서구에서 들어온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화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지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한다. 스노우의 말 처럼 한국 문화 내에서 과학은 다른 문화와 유리된 채 존재하고 있다.
고등학교과 대학에서 분류된 이과과 문과의 벽은 절대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일단 한 쪽에 속한 사람은 다른 분야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따라 문과와 이과는 각자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지니게 되고, 그들 사이에 몰이해가 결국 인반인들 전반에 대한 과학의 유리상태를 더욱 가중시키게된다.
문화 일반으로부터의 이같은 유리된 상태는 과학기술만을 독립된 영역으로조차도 자리잡지 못했다. 정부에 의한 과학기술정책은 단기적 최종산물 위주의 정책으로 일관되어왔다. 또한 각 연구소들의 높은 정부의존도와 더불어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정부부처의 장관과 관리직을 전문적 과학기술 관리 인력이 아닌 일반 행정관료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며 과학기술을 보다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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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주의적 관점에서의 과학문화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서 얼마간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이 보다 두드러지고 깊게 나타나고있다. 여기엔 우선 과학을 경제적 효용의 관점에서의 철저한 도구적 목적으로만 인식하고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과학문화가 중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두고 일면 한국적 토착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7, 18세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 과학지식을 습득한 계층은 대체로 양반 유학자와 지식인층이 아닌 중인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은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루어진 세습적 계층으로 지배 계층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사회 중대사의 결정에 아무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지위와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에 과학지식이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자연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중인의식으로 전래되어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이클 페러데이가 크리스마스 강연에서의 연설과 스티븐 호킹의 말와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과학 기술자들의 관심은 자기 분야의 전문적인 내용이나 활동에만 좁게 한정되는 일이 많고, 전체 사회와 국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과학문화는 중인 문화에 의한 절반의 토착화만 이루어졌을 뿐, 아직 일반 대중의 문화와는 융합하여 토착화되지는 못했다. 보수적 학계의 풍토는 과학자들의 대중 강연을 달가워 하지 않으며, 과학과 문화 일반의 유리는 깊고 또 넓기만 하다.
*김영식, 동아시아 과학의 차이, 사이언스북스, 2013
EBS, 지식체널e, 못배운 과학자
박권상, 과학문화의 대중화, 신문연구 겨울 통권56호, 1993.12, 28-37
이영희, 잠자는 숲 속의 미녀, 1996년 한국사회학회 후기사회학대회 발표문 요약집, 1996.12, 52-60
문중양, 과학기술 : 한국 유학사에서 과학사상사 서술의 과제와 방향, 국학연구 제3집, 2003.12, 391-415
이문규, 동아시아 역사 속의 한국 과학 다시 읽고 쓰기, 역사비평 2007년 여름호(통권 79호), 2007.5, 171-193
박정희, 김경훈, 과학문화를 위한 과학관의 역할과 발전방안 연구, 한국과학예술포럼 Vol.11, 2012.12, 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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