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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객 이분법에 의한 동일성 논리 비판
    사념 2011. 6. 22.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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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의 형성

    인간의 인간다움을 만드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서로 다른 타자가 아닌 동일한 하나의 주체로서 인식되며 동시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일 어제의 나의 기억이 오늘의 나와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오늘의 사유와 판단이 내일의 판단과 다르다면 '나'라는 주체는 더 이상 동일한 하나의 주체로써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억이 모두 동일 하다면 비로소 하나의 동일한 주체로써, 하나의 '나'로써의 동질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나에 대한 주체성을 유지하고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는 다름 아닌 기억임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만드는 기억의 근원, 사유와 판단의 근원이자, 동질성, 기억을 바탕으로 구축된 인간 지성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 진부한 대답은 인간의 뇌로부터 시작된다는 답이다. 인간은 뇌의 전기적 상호작용에 의해 한 개인의 인격과 지성, 사고가 발현되고 유지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뇌만을 살릴 수 있다면, 육체 따윈 필요 없으며, 영화 매트릭스에서와 같이 외부에서 전기 자극만 주어진다면 뇌만으로도 계속 꿈 꾸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라는 인간, 당신이라는 인격, 당신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단지, 편력에 의해 쌓아 올려진 지성과 기억에 의해서만 의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이 스스로가 주체성을 인식하는 주요 기능인 기억을 타인 혹은 동물, 극단적으로 기계에 주입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지식이 발현되는 공간은 뇌이며, 뇌의 전기자극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축된 기억 때문에 쉽게, 인간의 본질은 뇌에 있으며, 지성체의 근원이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지성을 낳은 뇌 만으로는 개인의 개성과 인격은 생겨나지 않으며, 자신을 인식할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배제 시키고 있다. 이것은 앞서 기억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이식되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자신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결국 어떤 형태를 갖추고 있던 육체라는 주체에 대한 객체가 있어야만 비로소 주체 자신을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성을 가지고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 주체의 객체의 상호 연관성에 있는 것이 아닌 철저히 두 대상을 분리하려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이 창조되었든, 진화되었든 상관없이, 인간과 동물간의 가장 큰 차이는 대상을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데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은 이러한 사유의 수단으로 언어를 이용하여 개념을 정의하고 사물을 매개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생물학적 발견에 따르면 인류는 6만년 전 부터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당시의 언어 수준은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약 11,000~37,000년 전 구석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 동굴 벽화가 대표적이다. 이 동굴 벽화에는 말, 들소, 사슴, 뿔큰 염소와 맘모스 등의 동물들이 털의 미세한 모습이나, 동물의 근육 하나까지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으며, 검정과 빨강, 황토색과 갈색 등을 사용해 정교하고 감각적인 그림들로 묘사되어 있다. [2]

    고대에 그려진 이 벽화와 같은 그림 기법은, 19세기 인상파 화가 이후 정밀화가 등장하면서 정립되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최소한 인류가 구석기 시대보다 지적으로 더 발전했다는 전제하에 시기적으로 판단하면, 인류의 예술감각 혹은 지적 감각은 오히려 역행하거나 퇴행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 라스코 동굴벽화는 역설적으로 이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류는 위협이나 경계, 분노 등을 알리는 기존적인 소통언어에서 점차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추상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라코스 동굴벽화가 고도로 정밀하게 그려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언어가 추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미메시스적으로 그림을 옮길 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나무를 그릴 때 갈색 직사각형과 녹색의 원 혹은 타원을 결합한 도형을 그리지만, 단순히 이 그림만으로 우리는 그것이 나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무의 본상은 아니다. 다시 말해, 나무가 추상화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객 이분법의 합리화

    17세기 이후, 근대 과학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언어는 보다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으로 발전되면서, 인간은 혼돈과 공포의 자연현상을 규정하고 질서지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서의 서양 철학의 인식론적, 윤리적 논의에서 인간은 자신을 대상으로 사유하며 자기의식을 획득해 나가면서 동시에,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 바깥의 자연과 경계지우고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이는, 어떤 것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보다 우월해야 하며, 다른 것보다 우월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과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고로 정립되며, 인간의 정신요소는 자연의 지배 도구로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근대 계몽주의로 합리화되며 정립된다. [3] 근대 과학적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근대 과학적 만능주의는 이러한 논의들의 산물이다.

    계몽의 원리는 인간의 자연 지배에 있다. 인간의 자기 보전은 자연의 공포로부터의 탈출, 곧 자연의 지배와 직결되기 때문에, 자기보존의 의지를 상실시키지 않으려는 인간의 불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계몽은 이러한 불안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 볼 틈도 없이 자신을 몰아 붙인다. [4]

    마찬가지로 근대 자연과학의 원리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 이외엔 아우것도 아니다. [5]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는 근대 자연과학의 이상이 수리물리학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이상 속에서 이성과 수학이 통합된다고 지적한다. 수학적 이성의 특징은 자연을 사고에 동일화시킨다는 점에 있으며, 이는 자연 지배적 이성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자연적 대상을 양화시키고 계산가능한 존재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6]

    근대 과학은 과학철학적 논의 과정들에서 이 점을 매우 잘 들어내고 있다. [7]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철학자들은 기호논리학의 발전에 힘입어 수학을 부분적으로 논리적 공리체계로 재정식화하는데 성공하자, 학문적 분과를 막론하고 모든 과학이론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지식의 확실한 통일적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며, 과학적 논리 실증주의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논리적 실증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의미의 증명으로, 문장과 명제는 오직 경험적으로 증명될 때만이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것의 의미는 문장과 그렇지 않는 문장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과학적 지식이나 이론은 결국 외적으로 경험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어떤 과학이론이 타당한가 하는 여부는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이며,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같은 인식하에서 논리적 실증주의는 의미 있는 언어를 무의미한 언어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구획기준을 제시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인식적으로 의미 있는 단어는 논리적 언어인지, 아니면 관찰적 언어 또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인지의 두 분류로 나누며 그 이외의 언어는 모두 무의미한 것 또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흄의 저서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를 결론짓는 데 다음과 같은 문구로 논조를 제시한 점은, 논리적 실증주의의 입장을 매우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

    『이러한 원리에 설득 당해 도서관을 대략 훑어볼 때, 우리는 어떤 대파괴를 이뤄 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어떤 책, 예를 들어 신에 관한 형이상학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형이상학 책을 손에 쥔다면, '그것에 양 또는 수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추론을 포함하는가?'라고 묻자. 답은 '아니오'였다. 그것은 어떤 실험적 추론을 포함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불 속으로 집어던져라.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아닌 궤변과 환영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은 일반적인 과학적 명제들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었을 때만이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한정된 수의 경험적인 증명만으로 일반적인 문장들을 진리라고 주장 하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등장한 것이 논리적 경험주의이다.

    논리적 경험주의는 이러한 논리적 실증주의의 문제점을 근거로 카르맵의 실증주의에 의해 발전되어, 증명이 완벽하고 명확한 진리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일반적인 문장들이 결코 증명될 수 없으므로 증명의 개념을 '점증적으로 확정이 증가되는 것'으로 대체시켰다.

    뉴턴의 중력이론이 등장하기 이전의 대부분의 과학적 사고는, 세계가 기계적 밀기와 당기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은 전혀 기계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적인 것을 넘어서는 원격작용을 제시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중력을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으로 향하는 반동적 복귀로 보고 전적으로 거부했다.

    뉴턴의 중력 이론 이후의 논리 경험주의적 정신은, 자연의 원인이 아닌 규칙성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자연과학자는 모든 현상을 특수한 경우로써 포괄하는 보편 진술을 알아 내야 하는 것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념은 19세기 프레그머티즘이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 반실재론적 존재자인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적 존재자에 대한 반대는 모든 실증주의에 퍼져있었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는 서로 다른 정도로 이론적 존재자를 불신했는데 그 중 러셀은 가능하면 언제나 추론된 존재자는 논리적 구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 존재가 자료로부터 단지 추가되는 존재자와 연관되는 진술은 자료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동치인 진술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에 의해서 논리적 실증주의자를 위한 거대한 환원주의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논리적 실증주의자는 이론적 존재자와 연관된 모든 진술이 논리학에 의해서 그러한 존제자에 관한 지시를 만들어내지 않는 진술로 환원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반면, 반 프레센은 이론적 존재자에 대한 실증주의적 반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논리적 실증주의의 환원주의 프로그램은, 원자론과 전자기학의 확립으로 이어갔고, 상대성 이론은 증명된 성과이었으며, 양자 이론 역시 비약적인 진전으로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논리적 실증주의의 극단적 버전인 환원주의가 발현된다. 이론의 문장을 현상에 관한 문장으로 환원시킬 이론의 문장에 대한 논리적, 언어적 변환이 원리적으로 존재하며, 원자, 전류, 전하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글자 그대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은 현상에 관한 문장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근대 과학주의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자연지배적 이성은 자연적 대상을 '의미'와 '질'을 배재하며, 그것들을 수학적 단위로 통합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 자연과학적 이성 앞에서 자연을 질적으로 파악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세과학이나 동양적 과학은 신비주의라는 낙인이 찍혀 배척되면서 결과적으로, 질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양화원리의 합리성이 자리잡게 된다. 동시에 계몽은 보편적 지배라는 자격으로 모든 인간적 사회적 지배를 변증하고 그 원리가 되려한다. [9]

     

    양화 획일화의 동일성의 전유 폭력

    근대 과학주의와 계몽주의가 자연지배적 이성을 가지고, 질을 부정하고 양에 의해 동일시하려는 보편적 지배 원리는 결국, 인간 자신의 자기보존이라는 맹목적 목적의 달성에 좌우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게 된다. [10] 따라서 이 도구적 이성은 그것이 어떤 목표에 따라 움직이든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 환원주의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사고를 획일화 시키면서, 이성 자신은 자신의 고유 능력인 성찰하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주체는 기술적 진행과 더불어 사물화 되고 만다.

    양화의 단편적인 예는 후기 자본주의의 보편적 논리인 자본에 의한 교환관계가 대표적이다. 평균 노동시간이라는 일반개념에 인간 노동을 환원해 버리는 교환원리는, 동일화시키는 사고와 근원적으로 유사하다. 동일화시키는 사고는 교환원리에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나타난 모델을 발견하고, 교환을 통해 동일하지 않은 개별존재나 동일하지 않은 것들이 측정 가능한 것으로 되며,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동일한 것으로 되고 만다. [11]

    이러한 교환원리는 모든 인간과 사물에 각기 내재하기 마련인 질적인 것들을 분리해 버린다. 가령, 개인의 가치는 연봉이라는 돈의 양적 가치로 환원되며, 개인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는 하나의 파이프 담배 역시 내재된 질적 가치는 배척되고 단지 파이프 담배의 가격이라는 양적 가치로 환원시켜버린다. 따라서 질적 가치를 배재하고, 모든 가치를 양으로 환원시키며, 타자를 억압하며, 통합되지 않는 것을 배제하고, 차이를 배제하며 모든 것을 동일화 시켜버리는 이 교환원리가 내포하고 있는 동일적 사유는 횡포이자 전유의 폭력이다.

    동일성 사유의 횡포의 또 다른 예는 문화산업의 메카니즘에서도 잘 나타난다. 문화산업은 인간을 시장의 법칙에 종속시키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문화 혹은 유행이라는 동일론적 가치로써 가치 사유를 동일화 시켜버리고 만다. 이렇게 동일화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질적 가치를 망각 혹은 배제한체, 스스로 객체화 되어버리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가 남긴 'This is not pipe' 라는 그림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횡포와 전유 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개인의 희노애락과 고뇌와 슬픔이라는 질적 가치가 담겨있는 이 파이프는, '파이프'라는 양적인 동일 가치가 아님을 이야기하며 동일성의 폭력을 폭로한다.

     

    주객체의 관계와 동일성 한계의 극복

    주체는 분명 대리인일 뿐 객체의 구성요인은 아니기 때문에, 근대 과학주의와 계몽주의가 형성한 보편적 교환원리와 환원주의의 동일화의 결과는 분명 퇴행이다. 하지만 동일화가 지금까지 전유의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동일성은 무조건 버려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동일화 논의를 가져온 근대과학의 환원주의와 계몽은 나쁜것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또 다른 전유의 전유의 폭력이자, 내용없는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의 근원과 주체 인식이 주체와 객체의 연관과 관계된 것과 달리, 인간 사유의 형성과 발달 과정이 주체가 객체로부터 분리되려는 과정에서 발현되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두 관계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어떤 것이 서로 관계 한다는 것은 서로 공통적인 부분을 가져야함을 말하고 있다는 데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가 철저하게 분리된 순수한 주체와 순수한 객체라면 이러한 주체와 객체는 서로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자연과 어떠한 공통적인 것도 가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연과 관계할 수 없으며, 인간과 자연이 철저한 타자라면 인간과 자연은 서로 관계할 수 없다. [12] 이 둘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주체는 객체를 통해 매개되며, 객체 또한 주체를 통해 매개된 상호성의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대 과학주의와 과학으로 자연을 통제하려는 발상은 그래서 퇴행이다.

    동일성의 원리는 사회적 적대원리를 반영하고 있다. 동일화된 하나의 사회 집단은 그 사회와 동일화되지 않는 타자를 사회의 동일성에 동화시키서나 배제시킨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처럼 동일성은 관용적이지 않다. 그래서 동일성은 차이에 대한 또 다른 횡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성의 인정이다.

    다양성이란 문자 그대로 모양이 여러가지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드러남이 알록달록하며, 끝없이 자체 변화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알록달록함은, 흰색이나 검은색만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색들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어느 한 색이 절대적 지위를 차지할 수도 없으며, 모든 색이 각기 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여러가지 모양은 서로 다른 나타남을 어떤 하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배제시키지 않는 것이 다양성이 담고있는 본래의 의미이며, 이 다양성은 자신 안에 동일성은 물론이고, 차이들도 함께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 아니면 도라는 기준의 이분법적 사유를 버려야 한다. [13] 서로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 때만이 비로소 동일성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오직 이럴때 만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사이의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1] 이병탁, 주체 객체 상호성으로서의 부정 변증법, 2
    [2] http://www.koreamonitor.net/bullinfo.cfm?category=Politics&upccode=BG6F7C3331-D
    [3] 이병탁, 주체 객체 상호성으로서의 부정 변증법, 3
    [4] M. Horkheimer und Th. Adorno, Dialektik der Aufklarung, S. 189.
    [5] Ebemda, S 14.
    [6] 최종욱, 동일성 해체주의자, 아도르노, 이론(15호), 진보평론, 252-253 (1996)
    [7] 윤석경, 이상용, 과학절학의 변펀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철학(9권), 12, 189-197 (1998)
    [8] Ian Hanking, Representing&Intervening, Hanulbooks, 2005, 68-123
    [9] 최종욱, 동일성 해체주의자, 아도르노, 이론(15호), 진보평론, 253-254 (1996)
    [10] 최종욱, 동일성 해체주의자, 아도르노, 이론(15호), 진보평론, 255 (1996)
    [11] Negative Dialektik, S. 149
    [12] 이병탁, 주체 객체 상호성으로서의 부정 변증법, 2
    [13] 박치완, 동일성의 폭력과 차이의 허구, 철학과 현상학 연구, 한국현상학회, 29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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