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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과학문화의 식민지성
    과학 2012. 12. 1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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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문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구석기 문화, 철기 문화, 농경 문화, 디지털 문화와 같이 그 시대 역사의 한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써 사용되기도 하고, 음식문화, 놀이문화와 같은 국가, 지역, 민족 특유의 스타일을 나타내는 말로써도 사용된다. 


    때문에 우리는 사상문화, 종교문화, 음악문화, 미술문화와 같은 문화를 하나의 수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문화라는 것은 어떤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문화는 그 사회와 시대의 역사적 맥락 속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것을 뜻하는 의미로써 일반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해 지는 것이 있다. 문화의 한 측면으로써 과학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과학문화라는 말 역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과학문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한국의 과학문화라는 것은 어떤것인가?


    앞의 ‘문화’라는 수식어가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방법, 스타일, 사고방식 등과 같은 이른바 문화적인 측면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현대 한국과학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서구는 지난 300년 동안 자신들의 주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지식체계와 방법론을 만들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과학기술문화를 이뤄냈다. [1]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한 과학의 획기적인 성공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 영향으로 18세기 계몽운동기에 과학 애호, 과학 지상주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8세기말과 19세기 전반에는 이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 사조가 퍼지게 되었고, 특히 기계적, 수학적 과학, 물리과학 위주의 구조와 사조에 대한 반발이 두드러 졌으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오면서 다시 과학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2] 


    현재 과학이라 불리는 독특한 하나의 학문 체계가 서구에서 만들어지고, 보편화 되는 과정에서 과학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담거나 혹은 그에 양향을 주며 문화의 한 요소로써 정착되어 나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를 말하는 것보단, 자신들의 주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과학적, 합리적이라는 지식 체계와 방법론을 만들고 충분한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친 문화로써 형성된 하나의 지식체계라고 볼 수 있다.


    중력의 법칙이나 빛의 속력과 같은 과학의 객관적 진리는 의심할 수 없으나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문화적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는 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라이프니치가 2진법 체계를 발견한지 이미 2천년전에 2진법 체계를 사용 했던 중국문명이 각각 컴퓨터의 발명과 점성술의 사용으로 그 사용 방식이 달랐던 것은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준다. 즉, 여성, 제3세계인, 타종교인, 타민족, 노동자, 유색인종, 빈민계급 등의 각각이 처한 상황에 따라 서구의 과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인식론적 단절은 불가피하다. [3] 


    이 같은 맥락에서 현재 한국 역시 한국의 역사와 문화, 경험에 의해 형성된 과학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한국의 과학 40년사를 다루는데 무슨 역사와 경험적 맥락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단 실험하고 관찰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뉴턴 이후의 과학만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과 그 자연지식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포괄한다면 보다 긴 역사 속에서 한국 역시 과학문화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 정착되고 인식되고 있는 과학문화는 여타의 다른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형성된 과학문화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정착되었다. 서구의 문명이자 문화의 한 축인 과학이 전혀 다른 문명과 문화권과 만나면서 생기는 단절은 자국의 현실에 맞게 과학지식을 소화하고 그 경험과 지식을 축적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정착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나, 한국의 과학문화는 이러한 과정과 기회를 빼았긴체 형성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우선 우리 역사에서 과학의 도입과 그 과정에서 과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 과학의 도입을 본격적인 개항 이전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청으로부터 도입된 18세기 서양과학의 도입과 소화 과정으로 그 시작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 유입된 서양과학은 뉴턴이전의 전근대적 과학으로 서양과학이라 해도 예수회 선교회를 통한 것이었으므로 철저히 중세적 우주관과 물질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과학을 배우며 그들의 종교를 물들게 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서양과학의 도입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기기술을 포함한 본격적인 서양 문물의 도입은 1876년 개항 이후로 이루어졌다. 이는 위계적 국제질서로부터 탈피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가들로 이루어진 사회로의 편입을 의미했고,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로부터 자본주의 경제로의 이행을 의미했다. [4] 서양문물의 본격적인 도입과 함께 진행된 조선의 부국강병에 대한 조선정부의 노력은 청의간섭 문제와 더불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정부는 새로운 서구의 기술을 조선정부의 통치의 도구들을 개혁하거나 변경하는 것으로만 파악했지 그것이 전혀 다른 세계관과 자연관을 기반으로 한 지식체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 토대인 과학과 사상에는 무관심했고 이를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과학이 무엇인지는 모르면서 과학만 하면 나라가 잘 되리라는 무비판적 과학주의가[5] 작용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새로운 지식 습득을 위한 알맞은 교육과 훈련에는 무관심 한 체, 서양과학에 압도된 나머지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기만 한 것이다.


    때문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국가 의료체계의 전반적 개혁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단지 조선이 근대식 병원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설치된 점이나, 전기기술을 도입하면서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할 인재를 양성하거나, 이 기술을 국내 산업과 연관시키고자하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준비없이 단지 보여주기 식으로 전기회사를 설치한 점이 당시 과학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6]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식 과학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문화권에서의 과학의 도입은, 서구과학의 도입과정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과학의 도입은 기술위주의 과학적 산물과 결과물의 습득 위주로한 근대화의 도구로써 과학을 활용하려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서양 과학 도입 초기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의 고유한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부국강병에 도움이 될수 있는 서양의 기기나 문물만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은, 이러한 조선의 과학에 대한 도구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여기에서 조선의 서양 과학문물의 도입 과정에서 나타난 무비판적 과학주의와 동도서기론이 결과적으로 도구적 과학관과 종속적 과학관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이것은 엄연히 다른 문화권에서 과학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와 태도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해 보인다.


    무비판적 과학주의에 따른 맹점과 오류는 시간의 경과와 함께 파악가능하며 극복과 대안 모색을 위한 과정이 수반될 것이며, 조선의 고유한 제도를 유지한체 부국강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서양의 기기나 문물만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 역시 서구의 과학이 조선의 고유한 제도 위에서 재형성 될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경험에 의해 형성된 한국 과학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형인 이유는 이러한 작은 가능성 마저 철저히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경험적 맥락에서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과학문화의 형성이 아닌, 주입에 의한 수동적 과학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과학관의 형성이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에는 근대 과학기술이 일본에 의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여러 기술학교들이 설립되어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교육은 철저히 일본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구성되었고 불평등하게 짜여져 있었다. 일본의 조선 내 각종 과학과 기술 교육과학에서는 저급한 수준의 실업교육만이 실시되었다. 조선 내에서조차 비교적 고등인력을 배출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재조선 일본인들이었으며, 극소수의 조선인들만이 입학이 허락되었다. [7]


    일제의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일본어의 진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지만 수학과 기타 과학을 말할 것 같으면 형편없다. 그 열세 정도를 비교하면 23~26세에서 32~33세로 구성된 혈기왕성한 장년자의 수리 두뇌는 일본의 고등학교 2~3년 급 소년에도 미치지 못한다”거나 “수리적 관념이 매우 유치해 도저히 근세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뇌력이 결여”되고 “수학은 전혀 불가”가 하다며, 한국인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적합하지 않고 불필요 하다고 주장했다. 일제 일제에 의한 조선의 과학과 기술 정책은 고급인력의 배출보다는 저급한 실업 교육에 편중되었을 뿐으로, 이 시대에 일본에 의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 기초가 형성되었 발전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8]


    그러다 의도적으로 차단했던 조선의 과학기술교육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조선에 과학이 없다”, “조선 일반사회의 과학적 수준이 극히 저조하다”고 실토하고 “과학교육의 진흥”에 나서게 된것은 제1차 세계대선부터였다. 1925년에 처음 유럽과 미국에 사찰단을 파견하고 전쟁 중의 과학이용, 과학자와 기술자의 양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 국가총동원계획의 일부로 과학동원계획일 수립하게 되면서부터였다. [9]


    전쟁의 발발에 따른 과학동원은 과학기술의 기초의 형성이 아닌 하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내셔널리즘을 과학에 오염시켜 일본적 과학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일본적 과학은 개인주의, 자유주의, 물질주의, 공리주의로 인해 위기에 처해있는 서구 문명을 구하고 세계 인류를 지도해나갈 새로운 과학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적 과학의 본체는 서구에도 없는 황도의 고로써 서구의 물질적 과학사상을 대체하고 인간적 협동조직과 정신적 일체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사상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공리주의를 배격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집단에의 헌신,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등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전통적 관념을 지향하였다. [10]


    일제에 의한 과학기술정책과 교육의 결과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나는 조선후기 등장했던 과학주의와 동도서기론이 더 이상의 발전이나 논의 과정 없이 단지 과학을 결과와 도구로만 이해하려는 인식과 태도에서의 단절이다. 그리고 하나는 근대 과학기술의 수용 과정이 사회 내부의 요구와 이해에 의해,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고민하는 것이 아닌 단지 수동적으로 주입된 일본적 과학. 그리고 이에 따른 수동적 태도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과학의 역사적 역할은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초석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화=근대화=선’이라는 단선적 근대상으로 과학을 개발과 경제성장에 있어서 실용적, 도구적 가치로만 간주되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1]


    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과학만 하면 나라가 잘 되리라는 무비판적 과학주의는 과학주의와 도구적 과학주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도형 근대화 과정에서 전국민의 과학화운동과 중화학공업화 선언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과학은 일본적 과학의 식민적 잔재를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도구주의 위주의 과학관과 천황이데올로와 집단의 헌신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적 과학관은 해방이후 유신과학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 결과 이른바 박정희식 과학 페러다임이 현재 한국을 여전히 배회하고 설득력과 힘을 가지고있다. 때문에 한국의 과학은 여전히 외국에 종속되어 있고, 그 결과 외국의 과학기술 수용에 있어 한국의 현실적 기반이나 요구보다는 외국의 이익이 우선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해방이후 과학기술의 종속성과 수동성은 카이스트의 설립과 원자력기구의 설립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는 우리에게 자국의 이익을 강제하는 국가가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임을 말하고 있다. [12]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근대화와 기술발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생산력으로써, 경제성장으로써의 과학기술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주체적인 과학 정책이 아니라 종속적이고 수동적이다. 일제과학과 유신과학의 정당화 논리는 닮아있다. 식민주의 과학문화가 여전히 오늘날의 한국 과학문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변화의 기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과학에 문화가 왜 필요한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요즘 강남스타일이 인기이고, 이 인기에 언제나처럼 언론은 한류라는 이름을 팔고 있다. 비단 강남스타일이라는 한 곡의 노래뿐만 아니라 한류라는 이름을 붙였던 많은 컨텐츠들을 보면 그것이 대단힌 한국적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것이다. 


    음악은 판소리가 아닌 서양의 팝음악이며, 드라마는 사극보단 현대극 위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서양의 문화를 한국적인 문화로 완전히 소화한 뒤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음악과 영화가 세계적 파급력이 낮은 것은 그들은 여전히 중국의 전통무술과 역사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세계보편의 문화를 아직 습득하고 소화한 컨텐츠를 생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과학 역시 같은 과점에서 볼 수 있다. 유럽으로부터 수입된 과학을 도입한 미국은 그들 특유의 자유주의사상과 자본주의사상에 녹여든 미국식 과학을 만들어 냈고, 영국, 독일, 일본 등도 각자 자국의 문화와 역사적 경험에 따른 과학문화를 형성하고 지금 각자 가 분야들에서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이 최근 10년 사이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단지 서양의 과학을 추종하기만 하던 서구문명에 대한 컴플렉스를 벗어나 일본만의 과학문화를 찾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한국은 식민주의적인 과학문화를 벗어날 수 있을까? 여전히 유신과학이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비관적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상태에서는 노벨상 못나온다.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48086
    [**]세종대왕, 훈민정음, 집현전 (1446)
    [1] 정인경,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 고려대 과학기술학협동과정, 3
    [2] 김영식, 과학문화에 대한 다각적 고찰, 한국과학사학회지, 24, 2, 242 (2002)
    [3] 정인경,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 고려대 과학기술학협동과정, 3
    [4]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 40년사, 23
    [5] 김영식, 김근배,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창작과비평사, 1998, 39 
    [6] 박윤재, 근현대 한국과학사의 이해를 위하여, 32
    [7]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 40년사, 28
    [8] Ibid, 29
    [9] 정인경,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문화의 식민지성, 고려대 과학기술학협동과정, 11-12
    [10] Ibid, 12-14
    [11] Ibid, 1
    [12] 박윤재, 근현대 한국과학사의 이해를 위하여,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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