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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인의 어깨위에 서기를
    과학 2013. 9. 1.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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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C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글(‘IBS로 노벨상의 꿈을... 뿜겠다, 정말!)이 화제다. 매해 울려퍼지는 노벨상이라는 유령은 이윽고 노벨상의 수상이 그 목적이자 목표인 정책 제도까지 등장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가 왜 리처드 스톨만이나 리누스 토발즈와 같은 인재가 아닌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같은 돈 많이 번 사업가를 인재의 상으로 삼고 있는 지를 보면 노벨상의 소비 양태를, 왜 노벨상에 집착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국경이 무의미해지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 국가라는 민족주의 형태의 국가 제도의 존속이 가져온 양립된 두 가치의 충돌은, 과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개념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정확히 충돌하고 말았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천재 과학자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는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사에 등장하는 주요 천재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슨 보어, 리처드 파인만과 달리 17세기를 살았다는 점에서 특히 높은 평가가 뒤따르는 인물이다. 당대의 뉴턴은 의심할바 없는 뛰어난 수학자이자 실험가였지만, 대단한 업적을 이룬 특출한 천채였다고는 볼 수 없다. 대게의 천재들이 그러하듯 뉴턴의 경우 역시 성취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유럽 전역의 대학 교양학부에서 으뜸 교과서로 지위를 누리던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은 16세기부터 차츰 공격받기 시작했다. 공격의 주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사변적이어서 실용적인 지식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계시자도 아니게 되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데카르트의 첫 출간물인 ‘방법서설’은 여기에 한 가지 답을 제시해준다. 그는 주장하기를, '신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속임수를 당하기를 허용하지 않을 테니, 우리가 사실을 확인할 적절하게 주의 깊은 방법은 사용하여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혀내면 우리의 결론은 믿을 만 하다'고 확신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기계론적 철학은 13세기 이래 유럽 전역의 대학교 교과 과정으로 군림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체하며, 최초의 과학연구기관 중 하나인 영국 왕립협회 결성에 ‘실험철학’을 협회의 특징으로 내걸었다. 왕립협회는 조금 더 베이컨주의적인 실험을 촉진하겠다고 밝히며, 선입견, 직감, 가설 등을 배제하고 단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을 실시하여 자연에 관한 지식을 늘려나가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뉴턴의 업적은 그가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밝혔듯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왕립협회가 개발한 실험철학이라는 독특한 벙법 덕분에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펼쳐나갈 수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데카르트가 ‘철학원리’에서 그려낸 운동의 법칙 가설을 검증하고 실험하며, 케플러의 관측 결과를 검정하고 정립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국의 과학 정책과 제도는 이러한 ‘거인의 어깨’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혹은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여기에 피히테의 이름이 스쳐지나간다.


    그의 책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는 수백 대의 왕국과 공국, 자유시로 이루어져 있던 19세기초의 독일이 나폴레옹 군대에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을 일깨우는 대중교육을 통해 치욕스러운 이민족의 지배에서 민족을 해방 시킬 방도에 대한 구상을 피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민족 또는 국민은 다른 민족 또는 다른 국민의 억압을 받을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 지각하게 된다. 피히테는 조국애가 국가 자체를 지배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연적 자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한 한 좁게 제한하여 그 모든 총동을 획일적인 규칙에 종속하게 하고 이를 끊임없이 감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비되는 국가주의와 애국주의의 양태는 피히테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애국이라는 배타적 감정은 배척해야할 타자의 존재를 상정하며, 대상의 태도와 정복을 선한 것으로 포장한다. 이 모습은 국가대표 스포츠 경기를 통해 고스란히 들어나며, 스포츠 스타의 해외 소식, 한류 스타의 인기와 활동등을 애국 행위로 포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외화자본 마져 끌어들인다.


    과학은 그 연장선상에 서있다. 첫째, 스톨만과 토발즈가 아닌 잡스와 게이츠 즉, 많은 돈을 벌 수 있는가. 둘째, 애국에 기여하는가. 여기에 과학은 어디에도 없다. 노벨상을 단지 올림픽 금메달로 인식하고 소비하는 태도에 노벨상이 주어질리 만무하다. 뉴턴의 말이 맴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지금 거인의 어깨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가? 만들 수 있는가?




    존 헨지, 서양과학사상사, 책과함께, 2012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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