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01


“명색이 종합대학인데 정원 미달이라니….”

“원전이 문제로구나….”


‘똑똑’


실험실 책상 넘어로 들러오는 노크 소리에 긴장 한 것도 잠시,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다시 모니터 화면을 응시한다.


“뭐하냐”


왠지 모를 한심한 눈빛과 표정으로 안부를 묻는 친구를 무시하며 나도 모를 하소연을 늘여 놓는다.


“원전에 대졸 이상의 전문 숙련 노동자 수가 적어서 폭발 위기에 쳐해있어. 그런데 시내 대학은 정원 미달이고 그나마 있는 졸업자들도 컴퓨터 회사나 반도체 회사에 들어가서 인력난이 심각해. 전력 수요를 감당 못해서 원전을 버릴 수도 없고, 유지도 안되고, 이렇게 되면 3년마다 재건설 해줘야 하는데 그러면 시 재정이 부담이 많이 되는 구만. 옆에 베드타운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심시티 좀 그만해라!”


친구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광역 내의 다른 도시를 새로 시작하며 그제서야 친구에게 방문 목적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으로부터 전해진 의외의 말에 나는 그대로 게임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물어볼게 있는데, 실재론이 뭐야?”


굶주림에 허덕이며 초원을 어슬렁거리던 한 마리의 사자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느낌을 잠시 억누르며 한 가지, 매우 중요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너는 과학이 뭐라고 생각하니?”



02


‘나에게 있어 과학은 즐겁고 흥분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는 매우 의외의 답을 듣고서 나는 성냥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히 꺼냈다.


“여기 내 손에 성냥이 한 개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생각해 보는 거지. 이 성냥은 왜 여기 있는 걸끼? 이 성냥은 왜 민들어 졌지? 이 성냥의 목적은 무엇일까?”


“불을 붙이려고 만들어 졌겠지?”


“그렇지. 이 성냥의 목적은 불을 붙이는데 있어. 그리고 이 성냥에 있는 막대까지 다 타고 나면 검은 재만 남아 불은 꺼지고 말겠지. 이 재는 이재 성냥이라 부를 수도 없고, 다시 불을 붙이지도 못하겠지. 이제 내가 다시 다른 성냥을 한 개비 더 가지고 왔어. 그런데 우리는 하나하나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이 것들을 성냥 이라고 인식하고 또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똑같은 성냥으로써 인식하겠지”


“그렇겠지”


“불이 붙는 성냥의 형상은 우리의 감각 세계로부터 감각된 형상이고, 불이 붙는 현상은 성냥이 가지고 있던 본질이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즉, 성냥이 가지고 있던 본질의 그림자가 불이 붙는 감각 세계의 경험으로 발현된다고 말할 수 있지.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라고 불렀어. 성냥이라는 제각기의 특질과 생김세 뒤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근원적 본체. 그리고 우리는 이 이데아 찾기 위해 고분분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지.”


“너는 과학이 이데아를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과학의 발전은 이데아라는 자연의 근원적 존재를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 비유를 할 수 있고, 또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이란 단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과정. 다시 말해서 자연의 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생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 두 가지가 실질론과 반실재론?”



03


답은 빨리 내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하는 나를 쳐다보며 보인 그의 지루한 표정과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과학이란 무엇일까? 과학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과학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그래…. 뭔데”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나 설명을 하려고 할때 난 바스카의 설명을 주로 인용하곤 하지. 음…. 이 책에… 어딧더라….”


책을 뒤적거리다 찾은 문구를 읽어주자 이상하게도 그의 눈에서 생기가 돋아났다.


‘과학은 경험되는 형상에서 그 현상을 발생시킨 어떤 것을 찾아 나가는,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이 도약 과정에서 인간은 귀납과 연역뿐 아니라 가추와 역행 추론으로 불리는 다양한 사유방법들을 동원한다. 바로 그것이 과학적 방법이며, 통계나 모델 구성이나 실험 등은 다양한 사유방법을 경험적으로 체현하는 것들이다. 이때 과학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추정하여 사유 속에 재구성한 실체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 자체는 구별되며 유사할 수도 있고 상이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기각, 수정, 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앤드류 콜리어, 비판적 실재론, 후마니타스, 2010]


“오호….”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저 파티션 너머로 특정 각도와 특정 속도로 공을 던지면 보이진 않지만 공이 어디로 떨어질 것인지 우리는 예측 할 수 있지? 정확한 거리와 위치까지 지정해서 말이야.”


“그렇지”


“뉴턴은 운동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자연이 가진 이데아의 모습을 찾아 낸거지. 이제 우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는 저기 저 멀리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가 점점 가까이 오고있다는 것을 알 고 있고, 몇 년 뒤에 우리은하와 충돌 할 것이지도 알 수 있지. 우리는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의 궤도를 알 수 있고, 만류인력의 법칙을 이용해서 인공위성도 발사하고 화성 탐사선도 우리가 원하는 지점에 보낼 수 있지.


심지어 상대성이론을 이용하여 블랙홀의 존재도 간접적으로 예측 및 관측 할 수 있고, 해왕성을 발견 했을 때 처럼 이론이 예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관측 되지 않았던 존재 또한 예측 가능하고 또 그대로 관측 할 수 있게 되었지. 문제는 여기서 부터야. 양자역학으로 가보자.”


“힉스 입자도 이론이 예측한 대로 발견됐지”


“그래. 이제 과학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리학자들은 이론에 기반하여 무엇을 예측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절대적 참으로 가정하고 그러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지.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하나 빠져있어. 힉스입자가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우리는 힉스입자를 우리 눈으로 본적이 없어. 볼 수 조차 없지. 경험, 관측이 불가능한 영역에 과학이 도달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선 이론적 예측이 경험적 사실에 앞서게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거지.


우리는 전자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양자역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20nm 공정의 CPU는 물론 SSD 심지어 STM까지 아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양자역학적 예측은 자연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플라톤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이데아에 한 층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거야.”


“양자역학은 보이진 않지만 실험 할 수 있잖아. 그리고 상대성이론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겠지만 측정을 하려면 할 수는 있을테고”


“문제는 그 다음이지. 자연의, 우주의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 법칙, 그러니깐 단 하나의 이데아를 찾아 나서겠다는 이론이 통일장이론이지. 여기에 끈이론이 있어. 이 끈이론의 문제는 완전히 수학적 기술로만 이루어져있다는 거야. 실험, 검증, 관측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지. 이런 상황에서 그럼 우리는 다시 앞에서 이야기한 과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되돌아가보자구. 끈이론이 진짜 과학이야?”


“그래서 실재론 이야기는 언제 해줄꺼야…??”


“이제 하려고.”



04


“여기엔 두 가지의 태도나 나타나겠지. 실험과 관측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해 나가야한다는 쪽과, 지금까지의 이론적 예측이 모두 과측결과와 일치해 왔으니 이론적 가설과 예측을 바탕으로 과학을 해도 문제 없다는 쪽으로.


해킹의 말을 인용 하자면.. 음…. 이게 또 어딨더라….”


‘과학적 실재론은 올바른 이론에 의해서 기술되는 존재자, 상태, 구조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성자, 광자, 역장, 블랙홀은 손톱, 터빈, 개울의 소용돌이, 화산처럼 실재한다. 소립자 물리학의 약한 상호작용은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실재한다. 유전부호를 운반하는 분자 구조에 관한 이론은 참이거나 거짓이며, 진정으로 올바른 이론은 참인 이론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학이 아직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실재론자는 종종 우리가 진리 가까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의 내부 구성을 발견해내는 일, 우주의 가장 먼 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목표로한다. 너무 겸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알아내 왔기 때문이다.


반실재론은 정반대로 말한다. 전자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전기 현상과 유전현상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끈 사건을 예측하고 산출시키기 위해서만 아주 작은 상태, 과정, 존재자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전자는 허구다. 전자에 관한 이론은 사고를 위한 연장일 뿐이다. 이론은 적절하거나 유용하거나 보장되었거나 적용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자연과학의 사변적 승이와 기술적 승리를 아무리 많이 숭배할지라도, 자연과학의 가장 유효한 이론조차도 참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이언 해킹,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한울 아카데미, 2005]


“아… 그러니깐 이론물리학자와 실험 물리학자의 차이 같은 거구나. 교수님들만 봐도 그렇고.”


“난 실험 물리학자에 대한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은 보편적 지식이 될 수 없고, 그것이 귀납적 추론에 의한 지식이라면 더욱이 보편적 지식으로 볼 수 없으나, 사람이라는게 꼭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으니 몇 번의 경험으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싹트게 되는데 말이야.


여튼, 이런 편견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표본이 늘어 갈수록 옅어져야 하는데 반대로 편견에서 지식으로 확정되는 것 같단 말이지.”


“무슨 편견이길레”


“아까 바스카가 주장한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서 과학의 특징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었어.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도약과 오류가능성과 함께 기각, 수정, 발전’ 될 수 다고. 여기서 소위 실험하는 사람과 이론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점이 나오지. 


넌 실험 하니깐 대충 공감가지 않아?”


“경험으로부터 도약하는 쪽이랑,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 그러니깐 이게 실재론자랑 반실재론자의 구별처럼 되버리는 건가? 난 그럼 반실재론주의자가 되는건가?”


“이상하게도 자신이 어떤 방법에 의해 과학을 훈련 받았는지에 따라 성향이 이렇게 양분되는 것 같더라구. 실재론이든 반실재론이든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선택할 필요도 없고, 그대로 따를 이유도 없이 그냥 학술 용어로써 분류해 놓았을 뿐이니깐 굳이 스스로를 구분 짓지 않아도되. 오히려 과학은 그 어떤 식민적 지배도 강요하지 않지만 말이야. 물론 최근엔 자본이라는 지배에 들어 와버렸지만”


순간의 짧은 한숨과 정적이 흐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며 말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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