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여기 이상한 파이프 그림이 하나있다. 르네 마그리드가 그린 이 파이프 그림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짤막한 문구가 한 줄 적혀있다. 파이프를 그린 그림에 파이프가 아니라는 이 언명은 곧,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의아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왜 자신의 파이프 그림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님을 역설 했을까? 그는 이 역설적인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그리고 말하고자 한 것일까? 


마그리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의 언어로 정의 되면서 발생하는 개념의 배제와 분리의 비판이었다. 그가 그린 그 파이프는 1차 대전 당시 전쟁에 참전한 세 아들들의 전사자 통보를 기다리며 피웠던 비운과 슬픔에 가득찬 파이프였다. 그러나 그림으로부터 나타나는 이 파이프의 모습은 그 어떠한 비운과 고통, 슬픔도 포함하지 못한 체, 단지 담배를 피우는 도구로써의 파이프로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이 파이프는 우리가 아는 도구로써의 그 파이프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인식수행에 있어 개념이라는 장치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며, 이 개념은 다시 추상화된 언어를 통해 매개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단지 사과라는 단어로부터 붉고, 둥글고, 새콤한 맛이 나는 열매를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붉고, 둥근 열매라는 추상화된 개념 장치와 사과라는 언어 사이의 매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결 고리는 마치 마그리드의 파이프와 도구로써의 파이프 사이에 존재하는 큰 단절처럼 둘 사이를 온전하게 연결 해 주지 못한다. 개념을 매개하는 그 언어가 무너진 바벨탑의 바벨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탑을 쌓아 신에 도달하려다 신의 노여움을 산 뒤로 인간은, 사물의 참 모습을 은폐하는 바벨의 언어를 쓰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사과는 그 자체로 사과의 온전한 모습을 담아낼 수 있었으나, 에덴동산의 언어를 잃어버린 노아의 자손들은 사과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 수 많은 특징과 가치를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 놓은 수 많은 의미 마져도 사물의 모습을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매사에 장황한 설명을 첨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규정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포함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인식은 인식과 인식된 것의 차이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굳이 철학이라는 사유가 필요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인식과 사유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며, 언어와 독립해서는 어떤 사유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언어는 처음에 위협이나 경계, 분노 등을 알리는 기본적인 소통언어에서 점차 고도로 추상화된 개념이 발전해나갔다. 고도의 추상화에 기인한 언어의 발달로 인간은 혼돈과 공포의 자연현상을 규정하고 질서지우고, 자신들의 사회적 노동을 발전시키며 진화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 인간은 자신을 대상으로 반성하고 사유하는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반성의 대상으로 놓을 수 있는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 자연을 경계지우고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자연에서 독립된 인간은 외적 자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 자연도 자신에게 점차 분리하려 하며,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외적 자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 자연도 자신에게서 점차 분리하려 한다. 그 결과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외적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내적 자연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하며, 인간의 이성은 자연의 지배도구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플라톤 이래로 자연을 자신과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파악하려했던 서양의 철학전통은 이러한 이성의 도구성과 합리성을 점차 강화시켜온 역사이다. 서양철학전통의 기만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분리와 배제로부터 개념을 추상화시켜온 언어와 함께 발달해왔던 철학은, 이윽고 오늘날에 이르러 바벨의 언어로서의 자연이, 인간이, 사회가 가지는 개념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라는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대부분 상실해 버렸다. 에덴동산의 언어를 재현하고자 추상화시킨 개념은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 또 다시 추상화 되어 나아가며, 현대 철학은 이제 그만의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거대한 바위로 전락해 가고있다.


‘아마추어 철학자가 진짜 철학자다’라는 구호는 때문에 현대 철학의 흐름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으로 읽혀진다. 마그리드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로부터 근대 철학의 지배와 이성 논리에 따른 이분법적 논리가, 개념과 그것의 내용인 객체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동일화의 폭력을 폭로한 것이라면, 이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철학의 본질적 질문이 가장 먼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상기시켜 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철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단지 탁상 위에서 ‘나는 누구’이며, ‘이 세상은 무엇이며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철학하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에덴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때문에 저자는 말한다. 위대한 철학자들 대부분은 강당에서만 고민하지 않았다고. 실제로 공자는 정치 컨설턴트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의 신부였으며, 마르크스는 잡지사의 편집장을 지냈다. J.S.밀은 동인도회사에서 평생을 월급쟁이로 보냈고, 율곡이나 정약용 같은 성리학자들도 삶의 대부분을 관료로 보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단순하고도 소중한 것을 다시 일깨워준다. 철학의 수많은 질문들은 교과서와 논문 속에서만의 탁상공론이 아닌, 탁상 밖과 강단 아래에서의 치열한 고뇌와 문제의식이 함께한데서 비롯된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이다. 때문에 철학의 진짜 문제는 학문의 아마추어에게 오히려 더 잘 잡히며, 해결방안 또한 보다 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 하나를 얻는다.


이것은 철학자가 아니다. 아마추어 철학자가 진짜 철학자다.


철학의 진리나무 - 6점
안광복 지음/궁리


p.s.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자기계발서의 성격을 짙게 가지고 있어 읽을 것을 추천하는 책은 아닙니다.



[참고문헌]

테오도르 아도르노, 홍승용 역,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이병탁, 아도르노 철학에서 객체 개념, 사회와 철학 연구회, 제16호, 10 (2008)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새길, 1994

존 헨리, 서양과학사상사, 책과함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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