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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2022. 1. 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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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기내식을 준비 중이던 비행기 내부에, 기장으로부터 긴급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도착 예정지의 활주로가 사라져 가고 있으며, 새로운 착륙 지점을 찾기 위해 현재, 하늘을 선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승객들은 우왕좌왕하며, 지금이라도 바다 위에 연착륙을 시도 해야 한다거나,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거나, 기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소리쳐보기도 했지만, 지금 이 비행기 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내 직감하게 되었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굴욕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승객들에게 주어진 운명인 샘이었다. 남은 기내의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워할수록, 창밖의 풍경이 더욱 환하게 반짝일수록,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창백하게 불타오를수록,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는 슬픔과 좌절,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착각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바람과 두려움과 관심과 집착이 투영된 결과물을 볼 뿐이다. 선회하는 비행기에 갇힌 두려움과 좌절의 감정은, 이내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승무원의 제지마저 뿌리치고는, 곧장 기장실로 달려가 소리친다. 저 아래 땅이 그대로 보이는데 거짓말을 멈추고 원래 행선지로 곧장 진행하라고.

     

    기장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내 상황을 다급히 관재탑과 뒷따르던 비행기들에게 전달하자, 몇몇 이들은 내 그럴 줄 알았다면 미소를 짓기도 하고, 기장이 거짓 보고를 했다며 무시하거나,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서로의 연료와 자원을 공유하며 시간을 끌어보기도 하는 등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후 전해진 기장의 메시지는 모두를 패닉에 빠뜨리고 말았다. 목적지 활주로의 절반 가까이가 이미 물속에 가라앉았다는 소식이었다.

     

    어떤 종류의 주장과 행동은 일종의 해방감을 약속하기 때문에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 행동의 결과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 삶이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원래의 행선지로 곧장 진행할 것을 주장하던 승객들은, 착륙에 실패하여 다시 기수를 올린 비행기와 이미 흥건해진 활주로를 바라보며 더욱 가슴 지미는 슬픔과 반동을 불러일으킨다.

     

    기장과 이 승객들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들은 충돌하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을까? 그리고 뒷따르던 비행기와 이륙을 기다리는 남은 비행기들은 관재탑으로부터 어떤 경로를 안내 받게 될까? 이들은 모든 승객들이 안전하게 이륙하고 안전하게 착륙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알 수 없는 우화가 기후위기를 마주한 현재 인류의 모습이다. 

     

    앞서가던 비행기의 승객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마비되어 비이성적 결정을 내렸다. 트럼프의 당선이 그러했고 브렉시트가 그러했으며,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반이민주의와 부의 불평등, 혐오, 차별이 그러했다. 기후위기가 더욱 가속화되고 거주 가능한 땅과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한계를 맞이 할 때, 이분 문법에 기초한 근대 정치체제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모두를 차등하고 구분 짓는 방식으로 소수가 자원을 독점할 것이며, 위기는 해결되지 못한 채 인류는 공멸을 맞이 할 것이다.

     

    하지만 기장이 던진 마지막 메시지의 효과처럼, 트럼프의 파리 기후협약 탈퇴와 판데믹이 기후위기를 세계인의 의식 속에 단숨에 각인시켰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신기후체제의 정치 문법을 만들기 시작했고, 자연에 대한 초월자로서의 인간이 아닌, 지구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반동과 회귀, 극단적 부정을 외치는 이들과 세력들 역시 존재한다. 이는 둥근 지구본을 들어 지구는 둥글다고 말하는 기존의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극단적 이분 문법이 아닌 다차원적 관계를 이해하고 연결하여 상호 소통하는, 신기후 정치체제를 필요로한다.

     

    선회하는 비행기의 기수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행선지의 끝에서 다시 기수를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방향을 지금 당장 합의하고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시작해야 할 몫이다.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 10점
    브뤼노 라투르 지음, 박범순 옮김/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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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goldenbug@gmail.com 2022.01.01 22:42

      재미있는 비유네요. (제가 예전에 쓴 독후감에 달았던 댓글이 하나 생각나네요. https://notion.blog/서평-현실-없는-이론-대안-없는-출구-『아프니까-청춘/#comment-19035 )
      기후학자들이 1990 년대에 조작질한 걸 몰랐다면 저도 즐겁게 이 우화에 동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 goldenbug@gmail.com 2022.01.01 22:42

      재미있는 비유네요. (제가 예전에 쓴 독후감에 달았던 댓글이 하나 생각나네요. https://notion.blog/서평-현실-없는-이론-대안-없는-출구-『아프니까-청춘/#comment-19035 )
      기후학자들이 1990 년대에 조작질한 걸 몰랐다면 저도 즐겁게 이 우화에 동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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