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 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여,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 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선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장군과 황제들이 이 작은 점의 한 귀퉁이를 아주 잠깐 지배하려고 흐르게 했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작은 점의 어느 한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구석 주민들에게 저지른 잔인한 행위를, 그들은 얼마나 서로 오해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었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를 미워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의 거만함,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어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망상은 이 엷은 빛나는 점의 모습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우리 행성은 우주의 어둠에 크게 둘러싸인 외로운 티끌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점, p26]



미국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발생하고, 알카에다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보복공격이 시작되던 그 때, 세계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급속히 진행되던 세계화의 여파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묶어 두었던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주변의 이웃과 친척들로 구성 되었던 공동체도 서서히 붕괴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윽고 이웃에 대한 적의로 급속하게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공허해져버린 이 공간을 메우려는 듯, 종교나, 사상,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앞세워 치유될 수 없을 더 깊은 갈등 속으로 서로를 몰아 넣었다.


우주라는 거대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하나의 작은 ‘창백한 푸른 점’을 떠올린다. 수 조개의 별을 거느린 수 천 조개의 은하들 사이에서, 손에 쥐면 부서질듯 초라한 존재로 밝게 빛나는 그곳. 고향도 문화도 피부색도 각기 다른 우주 비행사들이 저마다의 집을 향헤 함께 손짓 하는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이 ‘외로운 티끌’ 위에서 인류는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비난하고, 결국 서로를 죽이기까지 한다. 인류는 왜 폭력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혈연주의와 공동체 이기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를 등치 시키면서도 왜 자연주의와 인류애로의 확장은 거부하는 것일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취해 왔을까? 진정 우리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일까?


영장류 학자인 야마기와 교수는 이라크 전쟁의 참화와 르완다 분쟁의 난민 행열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이 적의에 제동을 걸어 보고자, 유인원과 다른 영장류들이 함께 공유하는 조상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살펴 나간다. 


그는 먹이로 부터 어떻게 사회가 구성되어 가는지, 성을 둘러싼 싸움이 어떻게 사회속에서 터부와 윤리, 도덕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지, 원숭이는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지 등을, 세세한 관찰과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인간 폭력성의 근원에 한발 한발 다가간다. 영화 ‘혹성탈출’이 그려내는 인간과 영장류의 모습처럼, 영장류와 원숭이 사회의 모습은 한 편으로는 매우 인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우리가 상실한 어쩌면 결여된, 인간 보다도 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당연한듯, 한치의 망설임 없이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길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보이저 2호가 보내온 우주 속의 작은 티끌이 전해주는 메시지처럼, 칼 세이건이 던지는 인류애에 대한 희망과 미래를, 그도 함께 과학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야기한다.



현대는 그런 인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놔둔 채 경계 없는 단계로 돌입해 버린 혼란의 시대다. 조상 전래의 땅은 국가나 기업에 매수 당했고, 지구화로 개인의 정체성을 붙들어두던 국가나 친족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사람들의 이동이 격심해지고 통신 기기가 발달해 사람들은 면이 아니라 점과 친숙해지게 됐다 안면이 있는 동료들이나 친족으로 구성된 공동체는 무너지고 가족내에서조차 비호혜적인 주고받기에 바탕을 둔 나눠 갖기 생활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폭력은 소멸해가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확실한 경계가 희박해진 뒤를 메우려 들 듯 막연한 행태의 집단이나 종교 사상의 원리, 관념적 내셔널리즘이나 공상적 민족주의를 앞세워 사람들을 싸움으로 몰아간다. 옴진리교가 저지른 사린 가스 살인 사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자폭 테러 등을 보노라면, 사람들은 단결하고 사랑을 확보하기 위해 굳이 적을 만들고 경계를 그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은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가정 내 폭력은 사랑하는 이와 믿음을 나눠 가질 수 없게 된 탓에 생겨난 초조와 안달을 과잉 표현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악순환을 어딘가에서 끊지 않으면 현대의 폭력이나 전쟁을 멈출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닌 능력을 좀 더 활용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사회성을 떠받치고 있는 근원적인 특징은 공동 육아, 공개적인 식생활과 함께 먹기, 근친상간의 금지, 대면 커뮤니케이션, 제3자의 중재, 언어를 이용한 대화, 음악을 통한 감정 공유 등이다. 영장류로부터 물려받아 독자적 형태로 발전시킨 이런 능력들을 활용해 인류는 서로 나눠 갖는 사회를 만들었다. 그것은 결코 권력자를 만들어 내지 않는 공동체였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공동체로부터 출발해서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짜 올라가는사회를 만들어 가야한다. 


인류는 다산성을 획득한 이래 공동 육아를 사회의 중심에 두어 왔다. 공동 식사도 근친상간 터부도 공동 육아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육아에 관한 행동이나 커뮤니케이션에는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 특징들이 많이 있다. 그것을 이용해 인간은 다시 한 번 사회의 화평과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인원의 새끼들과 갈리 인간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엄마 이외 사람들의 손을 편력하며 성장한다. 교육이 가능한 것은 인간들 뿐이다. 교시 행동은 사냥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 육식 동물이나 맹금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도 어미 몫으로 한정돼 있다. 인류에 가까운 침팬지에서조차 교시 행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 인간에게만 어미 이외의 존재가 아이를 가르치는 행위가 발달했을까. 수렵이 그 원인이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사냥을 하는 침팬지에게선 그런 식의 육아 흔적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사냥이나 육식이 아니라 공동 육아가 교육의 길을 열었음이 분명하다.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아이들은 다양성과 가소성을 몸에 익힐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복수의 공동체들을 오가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고릴라도 침팬지도 일단 다른 무리로 이적한 개체는 원래 있던 무리로 돌아가기 어렵다. 하물며 단기간 내에 여러 무리를 편력하기는 불가능하다. 무리들이 평화롭게 융합하기도 하는 보노보조차 암컷은 무리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없다. 인간 이외의 영장류에게 무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커다란 구속이며 행동제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일상적으로 다양한 집단을 출입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타자에 대한 허용성을 높임과 동시에 안면이 없는 동료들이 있는 집단에 금방 동화될 수 있는 가소성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경계 없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감춰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p303]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서로를 공감하며 아픔을 함께나누는, 그런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인간 폭력의 기원 - 10점
야마기와 주이치 지음, 한승동 옮김/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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