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lavinka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한 일본 과학자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의 어떤 포스트를 읽게 되었다. “쓸모없는 연구의 효능”이라는 이 글의 제목에서, 10월이 되면 언제나처럼 들려오는 한국의 노벨상 타령에 대한 그 흔하디 흔한 잔소리들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이 글을 최근 거의 매년 노벨상을 배출하는 일본의 과학자가 쓴 글이라는 사실에 순간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글은 2012년 일본수학협회에서 발행하는 ‘수학통신’ 여름호에 실린 글이다. 여기에 소개해 본다.


쓸모없는 연구의 효능 (http://planck.exblog.jp/18356964/)


재작년 가을,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의 수학 교실에서부터 수학교사를 겸임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물리학자로써 교육을 받아, 제대로된 정리를 증명한적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수학에 기여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 전, 일본수학협회의 회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수학통신의 서문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수학자가 아닌 자신이, 본지 독자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무엇일까 고민하다 『쓸모없는 연구의 효능』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다.


물론, 직접 쓸모있는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있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쓸모없는 연구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화제라는 것이 좋지 않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지에서는 순수수학 기사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연구의 효능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태어난 수학과 과학의 발견이, ‘상상하지 못하는 응용’을 가져다 주는 것은 흔한 일이다. 19세기에 전자기유도를 발견한 마이클 패러데이는 당시 재무 장관이었던 윌리엄 글래드스톤이


“전기는 어떤 실제적인 가치가 있는가?”


라고 물었을 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것에 대해 세금을 부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패러데이의 발견은, 전기력과 자기력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그 두 가지 힘은 맥스웰에 의해 하나의 방정식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패러데이와 글래드스톤의 대화가 있었던 이후부터 반세기가 지난 뒤에, 전기와 자기의 통합으로 전자기파가 발견되고, 클리엘모, 마르코니에 의해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 통신이 실현되었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호기심에 의한 발견이 오늘날, 정보사회의 기초가 되는 기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쓸모없는 지식의 효용”은 프리스턴 고등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아브라함 플렉스어의 1993년 잡지 ‘하 퍼스’에 기고한 기사의 제목이기도 하다. 플렉스나는 전자기의 통일에서부터 무선 통신이 태어났다는 위의 에피소드 등을 예로 들어,


“과학의 역사에있어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 중요한 발견의 대부분은, 쓸모있기 보다는 자기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연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또한


“이렇게 쓸모없는 활동에서 태어난 발견은, 쓸모있는 것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보다 무한히 큰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70년의 오래된 기사이기 때문에, 좀더 최근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학장인 장루 샤모는, 올해 봄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었다.


“과학 연구가 무엇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미리 예측할 수는 없지만, 진정한 혁신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마음과 집중력을 가지고 꿈을 볼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은 확실하다.”


“보기 쓸모없어 보이는 기술의 추구와 호기심을 응원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보호하고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수학 및 이론물리학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고등연구소의 초대 소장인 플렉스나가 쓸모없는 연구를 장려하는 것이 한편으론 당연하다고 말 할지 모르지만, 토목공학을 전공으로하는 샤모 총장이 이를 장려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그는 이것이 자국의 이익이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쓸모없는 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플렉스나나 샤모의 인용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수학이나 기초과학의 연구는 연구자 자신의 가치를 위해 행하는 것으로, 굳이 상상할 수 없는 응용 등을 이끌어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확실히, 과학은 인류를 미신이나 편견에서 해방하고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해 왔다. 앙리 푸앵카레는 ‘과학을 위한 과학’을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플렉스나나 샤모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응용을 목표로 연구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플렉스나는 같은 기사 중에서, 과학의 연구는 “개인의 영혼을 정화하고 증가하는 것에 의한 만족감만으로 정당화 할 것이다.”라고 명학히 말하고 있다.


반면, 상상할 수 없는 응용이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의한 연구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발견의 가치를 평가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는지, 또 얼마나 새로운 연구를 촉발하는지에 대한 것 또한 하나의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푸앵카레 자신도 ‘쓸모있는 과학’은 보다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과학에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더 많은 과학의 설명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편적 가치가 있는 발견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고, 실용적인 방면에서도 응용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소속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사립대학이기 때문에 재단이나 기부자에게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설명할 기회가 많이 있다. 그때,


“이러한 연구가 정신적 풍요를 가져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 될 것인지 알고 싶다”


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질문에서 후자가 가지는 질문의 의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폭넓은 지원을 받기 쉽다는 친절한 조언이다. 이럴 때는 “흥미가 향하는 대로 연구하고 있다”라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기초과학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일본에서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 연구의 대부분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납세자가 캘리포니아 대학의 재단이나 기부자와 같은 고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대표자에게


“10년후에 어떠한 회귀가 있겠는가?”


라고 물었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평소부터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일본의 풍조를 보면 장인에 대한 격리가 눈에 띈다. 우리가 매일 손으로 만지는 대부분은 과학의 성과에 의해 개발되었거나 개선된 것으로, 그것들이 더욱 발전하기 하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응용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혁신이 가늘고 짧지 않도록 ‘쓸모없는 연구’를 실행하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해야 할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아니, 과학이라고 말하면 먼저 무엇을 떠올리는가? 아니, 우리가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과학은 우리에게 과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가? 과학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서관이나 서점, 교과서 등을 제외하고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과학에 대해 접할 수있는 내용들은 아마 과학관련 기사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과학 기사들의 주요 내용은 이것의 발견으로 나타날 파급 효과, 경제적 이득, 응용분야, 관련 산업의 육성으로 인한 효과 등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어느세인가 돈이 되지 않는 연구는 연구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교육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은 자본주의화 되고, 연구원은 비정규직화 되고, 늘어나는 박위자들에 대한 대책은 없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외침은 한편으론 공허해보이기도 하며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쓸모있는 과학’이란 돈이 되는 과학이며, 쓸모없는 과학’이란 돈이 되지 않는 과학이기 때문에 쓸모가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어떤 응용이나 목적을 위해 발전하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샤모의 말처럼 보기 쓸모없어 보이는 기술의 추구와 호기심을 응원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이 되는 것이며, 보호하고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파인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왜 우리는 문제들을 해치워 버리려고 노력하는 걸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는데 말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실수를 범하게 될 유일한 가능성은 성급한 혈기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쉽게 결정해 버리는 경우 뿐이다. 그러면 그걸로 끝난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다. 그것으로 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인류의 거대한 역사를 이 시대 인간들의 편협한 상상력 안으로 가두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 우리는 멍청하다. 우리는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정부의 힘’을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의 간섭은 여러 측면에서 제한되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강조하는 것은 ‘지적인 문제’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논할 수는 없다. 작은 부분만, 바로 ‘지적인 면’만 보자는 것이다.


어떤 정부도 과학적 원리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떤 문제를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부는 간섭해선 안된다. 정부는 예술적 창조물의 미적 가치를 단정해서도 안되며,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적 표현 양식에 대해서도 규제해선 안된다. 또 경제적, 역사적, 종교적, 철학적 이론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서도 정부가 판단해선 안된다. 대신 정부는 국민들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자유를 계속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우리 모두가 인류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모험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만이 있다.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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