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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어쩌다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나
    사념 2016. 6. 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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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들은 수학과 과학을 왜 배운다고 생각하나요?’


    오늘날 과학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서술 되거나 수치화 된 데이터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덕분에 과학 이론으로 정립된 법칙이나 수식 등은 그 자체로써 신뢰를 보장 받으며, 그 결과를 증명된 진리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물이 H2O임은 과학적으로 서술 된 사실임으로, 물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모두 과학적 서술인 H2O로 귀결된다. 때문에 우주를 바라보는 개인적 관점과 이론은 모두 현대 물리학이 서술하는 우주론 앞에서 모두 폐기 처리 되며 오답인 것으로 간주된다.


    수업을 시작하며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 물은 것은, 이 지점에서 학생들이 겪는 고충 때문이었다. 또한 이론 수업 절반과 실험 수업 절반을 연속적으로 진행하는 수업의 특성상, 수치화 된 측정값에 대한 맹신과 물리학 이론을 바라보는 절대적 신뢰가,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괴리를 형성하는 과정을 시차 없이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과학을 배움으로써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가? 물이 H2O라는 사실? F=ma로 서술 되는 뉴턴의 운동방정식? 당연하게도 우리가 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과학이 전해주는 그와 같은 결과적 지식을 암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바스카의 표현을 빌려 과학을 묘사 한다면, 과학은 경험 되는 현상에서 그 현상을 발생 시킨 어떤 것을 찾아 나가는, 구축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실제로의 도약으로 특징 지을 수 있으며, 이 도약 과정에서 인간은 귀납과 연역 뿐 아니라 가추와 역행 추론으로 불리는 다양한 사유 방법들을 동원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며, 통계나 모델 구성, 실험 등은 다양한 사유 방법을 경험적으로 체현 하는 것들이다. 이때 과학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추론하여 사유 속에서 재구성한 실체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 자체는 구별되며 유사할 수도 있고 상이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수정, 발전, 기각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학이란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추론 되고 검증 되어온 역사 그 자체이며,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과학적 지식 역시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주어진 문제를 연역적, 귀납적 방법과 같은 이른바 과학적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며, 수학은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전개, 정립, 체계화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주어진 지식을 단순 암기하고, 이론에 맞춘 실험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30여 분간 이어진 이 같은 이야기가 끝나고 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의도와 목적은 알겠으나, 주체적 사유 보단 수동적 정보 취득을 보다 선호하고 또 원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식의 습득과 전파는 단순한 정의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를 일반에 의해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왜’를 아는 것이 ‘무엇’을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제는 신념처럼 되뇌는 제임스 왓슨의 이 한 마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등불을 비추어 주었다. 왜 1m는 1m인지, 왜 1kg은 1kg인지 등의 역사적 배경과 그 안에 담긴 물리적 논의와 이론, 공식의 응용이 아닌 역사적 철학적 이야기를 곁들인 수업을 준비하며, 단순한 문제 풀이나 기계적 실험 진행보다는 절차와 과정을 통해 ‘무엇’ 이라는 단순 지식의 추구와 주제로부터, ‘왜’ 라는 과정과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의 이행에 집중하였다.


    이 과정은 나 자신에 대한 자문으로 이어졌다. ‘무엇’ 이라는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닌, ‘왜’ 라는 의문에 주안점을 두어야 함을 학생들에게 강조하지만, 이를 강조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어떠한가?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저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하며 우주를 동경하던 어린 시절,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품어오던 나의 과학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무엇에 더 가까웠을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물리학을 좋아하고, 그래서 물리학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된 것은, 특이하게도 와인버그가 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최종 이론의 꿈’에서 그가 ‘철학에 반하여’라는 제목을 붙인 장에서 보인 모습은, 단지 인문학자들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냉소 만을 비판했던 스노우의 감성적인 주장과 완전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논거와 주장 등을 모두 이해하고 반박하고 있었으며, 특히 대중 철학에 대한 비난이 아닌 포스트 모더니즘 과학 철학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수용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는 왜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수용할 수 없었는가?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를 원초적인 질문으로 이끌었다. 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내가 하려는 과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과학을 하려고 하는가? 


    그 중에서도 왜 입자 물리학을 하려고 하는가?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 산맥의 성채’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이 물리학 지식의 부감풍경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산맥은 물리학의 기본 가설과 공리 그리고 검증된 사실들로, 정상의 성채는 최신 물리학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을 형성하고 있는 토대는 증명될 수 없는 선험적 명제를 바탕으로 수학적 연역 체계 위에 건설되어 있다. 물리학이 고전 역학과 전자기학, 열역학, 양자역학에 이르기 까지의 연역 체계는 견고한 듯 보이지만 몇 개의 선험적 명제 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절대적 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물리학의 견고해 보이는 성채 조차 실은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바위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산맥의 정상에 설립되어 있는 성채 중 일부는 단단한 산맥 위에 설립되어 있음에도, 검증 불가능성과 반증 불가능성을 이유로 과학 이론의 지위를 의심 받는다. 내가 수 많은 물리학의 분과 학문들 중에서도 이론 물리학, 특히 최신 입자 물리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자연을 서술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과학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과학적 방법에 따른 검증을 거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종교적 믿음이나 논리가 결여된 이데올로기 혹은 희망 사항 등에 바탕을 두고 실제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과 거리가 멀다.


    표준 모형 이론이 정립되는 과정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표준 모형 이론은 이론이 등장한 이후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실험 결과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이 같은 모순을 해결하고자 이론을 확장하면서 이론 체계는 매우 복잡해 졌다. 그러나 보다 정밀한 분석을 거친 결과, 실험 결과의 잘못임이 밝혀지면서 이론의 복잡성을 요구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표준 모형 이론은 입자 물리학 이론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모든 실험 결과를 논리적으로 예견해 냈기 때문에, 반증 가능 이론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신 물리학 이론 중 하나인, 끈 이론은 어떠한가? 현재 끈 이론은 당장은 아무것도 예견하지 못하며, 실험적 검증은 요연하다. 따라서 반증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끈 이론은 과학이라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순한 희망 사항일 뿐인가?


    끈 이론의 과학성 논쟁은 장님의 코끼리와 코끼리의 논쟁으로도 볼 수 있다. 과학이라는 거대한 산맥의 최첨단에 설립된 이론이 장님의 코끼리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과학임이 틀림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전자기학 이론은 실험에 의해 구축된 4가지 방정식과 몇 가지 공리들을 전제로 연역 발전 시킨 체계이며, 이렇게 연역 추정된 이론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며 그 유효성을 입증 받았다. 끈 이론 역시 같은 논리, 연역 체계를 통해 추정되는 이론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기반이 되는 물리학의 지식이 단단한 산맥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이론 역시 과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끈 이론이 장님의 코끼리라면 끈 이론의 기본 가설과 전재로부터 양자 역학과 상대론, 나아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에 대한 설명 등을 연역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실험적 검증은 상당 부분 해결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이러한 연역은 가능한가? 그리고 검증 가능한가? 왜 하필 끈 이론인가? 연역 가능한 이론의 정립은 불가능한가? 등이다. 물리학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왜’ 라는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또 답하기 위함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입자 물리학에 집중하고 싶은 것은, 라투르와 울거의 표현처럼 신뢰할 수 있는 실험적 사실에 이르는 과정과 실천을 통해 사실이 구성되는 이론을 정립하고자 혹은 그 과정에 참여하여 물리학 지식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함이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가능할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까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목표와 과제는 나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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